지금 나는 분홍빛 복숭아나무, 연노랑 배나무를 비롯해 꽃이 만발한 과일나무들에 푹 빠져 있다네.붓질을 하는 데 어떤 법칙을 따르는 건 아니야. 그냥 되는 대로 캔버스에 색을 입히지. 두텁게 물감을 바르기도 하고, 캔버스 이곳저곳을 비워 보기도 하고, 구석 부분은 아예 내버려둬 보기도 하고, 덧칠하고, 거칠게 표현해 보기도 하고. 테크닉이 변하는 것을 무슨 큰일이라고 난 듯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걸 보고 좀 속이 불편할 것이네.
--- pp.108-109
자화상 속에서 빈센트의 시선은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 빈센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자신뿐이었다. 그는 생전의, 혹은 사후의 명성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1888년 9월,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렇게 쓴다. "오후에는 나는 관람객을 골랐다. 포주 네댓 명과 부랑아 열두 명, 튜브에서 물감이 나오는 것 유난히 재미있어 하더구나. 이 관람객들, 그들이 바로 영광이다. 나는 론 강가와 아를 촌구석을 떠도는 이들 부랑아들처럼 야망이나 영광 같은 것들을 맘껏 비웃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는 명성을 얻는 데 무관심했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바라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빈센트를 화가 자신의 시선, 오로지 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물감 튜브에서 나오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다.
빈센트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명성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모습을 유심히 읽고 또 읽어야 한다. 1881년 11월 23일, 빈센트 라파르트에게 이렇게 쓴다. "... 보통, 아니 좀더 전문적으로 말해서 화가들을 볼 때, 나는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과 작품 자체에 똑같이 관심을 갖는다네. 사람을 잘 알지 못하여 작품만 보아야 할 경우(모둔 화가를 개인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 않나)와 반대로 작품을 잘 알지 못하나 사람만 아는 경우가 종종 있지." 1882년 3월 혹은 4월, 테오에게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항상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예술가에게도 사생활에서 겪는 고통을 개인적인 것으 로 간직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고통은 필경 창작의 어려움에서 생기는 것일 테지."
pp.17~18
내가 얼마나 정착해서 살 나만의 집을 갖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 1888년 9월, 테오에게
노란집....
노란집에 정착하고 나서 그는 테오에게 "처음부터 나는 이 집을 나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있게 꾸미고 싶었다. 그러니 돈이 많이 들 수 밖에. 남은 돈으로 의자 12개, 거울 하나, 그리고 작은 생필품 몇 개를 샀다"고 한다. 산 물건들을 하나한 꼽으면서 거울을 '작은 생필품'보다 먼저 언급한다. "난 이 집을 정말 예술가들의 집으로 만들고 싶단다. 비싼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의자에서 벽에 걸어 놓은 그림까지 독특한 개성이 있는 그런 공간으로... 이렇게 진지하게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네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집을 꾸미고 앞으로도 내가 계속 관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예술가들의 집이 드디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1883년 말, 그는 이렇게 썼다. "약간 불행하고, 개인적인 고통과 깊은 슬픔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의 집'이라 해도, 그곳은 적어도 어떤 호회와 솔직함, 진정으로 인간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또한 가지 좋은 점이라면, 거드름을 피울 필요도 없고,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빈센트는 자신이 꾸민 노란집에서 고갱을 기다린다.
p.184
나한테 테오가 없었다면 원하는 대로 작업을 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1887년 여름 혹은 가을, 빌헬미나에게
따돌림당하고, 무시당하고, 외롭던 빈센트에게 테오는 유일한 구원자였다. 1883년 10월, "나도 신뢰와 애정이 필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보렴,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너, 너만이 이 원칙에서 예외란다..."라고 한다. 1883년 12월에는 "하지만 아우야, 이건 알아라. 너만 빼고 모두가 날 버렸다"고 한다. 같은 달 말, 그는 테오에게 불안한 마음을 내비친다. "테오야, 나는 미쳐가고 있다. 그건 나도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한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있는것 아닌지, 또 이득도 없는일을 하면서 우애를 핑계삼아 네 돈을 받아 챙기고 있는 것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거든."
...중략
빈센트는 자화상을 그린다. 빈센트는 또 다른 거울인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마주 서서 서로의 눈 속을 한 번 바라보자꾸나." 1877년 1월, 그는 이렇게 썼다. 9년 후 빈센트가 테오를 파리에서 재회했을 때, 그가 보았던 것은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었다. 1883년 11월, 테오에게 그는 "..... 네가 주는 도움은 냉담한 세상과 나 사이에 드리워진 보호막이자 피난처다"고 한다. 테오는 빈센트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배려해 주고, 곁에 있어 주었다. "돈이 없더라도 나한테 편지해 다오. 아우야. 돈도 돈이지만, 나를 지지해 주는네 공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테오는 그렇게 끊임없이 형의 든든한 성벽이 되어주었고, 지지해 주었다. 테오가 있을 곳은 모델의 자리가 아니었다.
pp.6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