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사 병원, 비평 클리닉
1950년대의 이어령은 자기 세대를 화전민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생각이 한국 근대 지성들의 일반적 사유라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시조로 삼는 방식의 화전민적 사유, 수입상의 사유가 아니라, 한국사상의 역사 속에서 축적하는 사유가 요긴한 지금이다.
1부에서 먼저 저자는 문학비평에 대한 비평을 싣고 있다. 김우창이 역설한, 체념을 통한 해방―그 내재적 초월성을 통해 저자는 “저 만인의 전장(戰場) 안에서도 삶과 예술, 문학은 여전히 가능적이다”라고 말하며, 단절된 한국문학사를 반복해서 불러오는 괴로운 포르트다 게임, 문학비평을 했던 김현을 통해 문학을 “문화”로 감싸 안는다. 최원식의 ‘문학의 귀환’이 놓친 ‘작품’들에 대해서는 “논증 없는 청산은 청산이 아니라 살해의 기획이다”라며 한국문학을 옹호하고, 김철, 공임순의 비평서를 비평한 글, ‘아카이브 밖으로’에서는 역사, 사회적인 관점에서 문학을 입체적으로 연구했다. 또한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보이는 심미적 문체는 “당대 정치경제학이라는 억압에 대한 한 세대의 부활”이라고 언명함으로써 문학, 문학의 본질에 우리의 사유를 환기시킨다.
<해당 목차>
체념과 해방―김우창의 근대문학론과 내재적 초월론에 대한 스케치
문학사 병원 혹은 비평 클리닉―즐거운 비평 이전의 김현 문학사들에 대해
차이와 반복―회통, 민족적 기억과 코스모폴리탄적 문체
아카이브 밖으로―문학?국가?비밀, ‘국민문학’ 비판론들에 부쳐
1960년대식 자기 세계와 그 문체―김승옥의 「무진기행」과 4?19세대의 문학 의식
2 무상의 시간과 구제의 시간―문학과 역사
역사를 무상한 것으로 보고, 지금 이 순간만을 역사의 실경 혹은 실감으로 생각하는 방식이 갖는 효과는 어떤 것일까. 저자는 2부에서 역사를 탈환하는 일이야말로, 현재적 삶을 구원하는 길이라 말한다. 2부에서 저자는 역사와 정치,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문학사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국가, 민족, 국민 같은 개념을 뛰어넘어 “타자로서 망명”한 인간에 대한 단상들, 역사에 희생하는 숭고로서의 예술의 의미, 문학은 역사를 어떻게 알레고리화 하는가, 이문열, 박민규, 성석제 등의 작가들은 숭고한 희극, 숭고한 농담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문학의 방향으로 연동해 나가는가 등을 다룬다.
<해당 목차>
넘은 것이 아니다―국경과 문학에 대한 단상들
벌거벗은 삶과 숭고―벤야민의 밤과 별, 그리고 예술의 의미
역사와 알레고리―폐허의 박정희, 포개어 놓기라는 방법
무상의 시간과 구제의 시간―끝나지 않는 신체제, 종언 이후 일본의 역사상
답변에 대한 질문: 웃음이란 무엇인가―이문열과 성석제, 숭고한 희극과 배중률적 농담
3 늑대처럼 우는 개―포스트모던 동물원
대중문화 코드 ‘엽기’는 어디서 기원해 어디에 이르러 있는 것일까. 메이지 말기의 작가 사토 하루오가 curious hunting의 뜻을 ‘엽기탐’이라고 번역한 일에 연유한 엽기가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새로운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 사정은 어떤 것일까. 3부에서 저자는 한국의 시인들이 처한 포스트모던 상황을 도시 안으로 추방되어 늑대처럼 우는 개로 표현한다. 1990년의 (추방 가능한) 욕망하는 개인은 장정일, 기형도, 유하 등의 시 속에서 제국이라는 레비아탄에 맞선다. 또한 알레고리의 달인 박민규, ‘숭고한 희극’을 쓰던 성석제의 수다가 사라진 ??참말로 좋은 날??의 비극, 그리고 지금 한국문학에 범람하고 있는 엽기 문화의 저속한 유물론에 대해 서술한다.
<해당 목차>
늑대처럼 우는 개―시와 그래피티, 포스트모던 상황과 한국의 시인들
날아라 알레고리―박민규 소설로 해 본 의식 확장 실험의 한 사례 보고
절단(을 절단)하는 이 사람―말이 말이 아니고, 법이 법이 아니며, 인간이 인간이 아닌 『참말로 좋은 날』의 성석제
주살(誅殺)된 달마-엽기 문화의 한 읽기
4 프랑켄 마르크스―사이보그 2000의 문화 생활
핸드폰과 노트북/컴퓨터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 자체가 인간의 확정된 신체가 되고 있다. 근래에 화두가 되고 있는 사이버 문학에 대해 4부에서 저자는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확장된 신체는 악의 두뇌를 내장한 조잡한 누더기, 즉 프랑켄슈타인의 그것이 아니라 프랑켄 마르크스라 불리게 될 감각부터가 이론인 그런 몸이다.”라면서 이 몸을 가지고 “다르게 느끼라, 다르게 향유하”라고 한다.
청년 마르크스는 자연을 인간의 신체로 느낌으로써 도달되는 곳이 생활이라고 말한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라는 마르크스의 언명, 바로 이 육체성, 감각성, 자연성으로부터 해방에 도달하는 마르크스의 감성 해방의 유물론은 우리에게 여섯 번째 감관, 즉 기계의 신체성에 대한 유력한 자문을 주는데, 즉 우리는 우리의 확장된 기관을 다르게 느끼는 해방의 기관으로 정향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근거해 저자는 사이버 문학이 문자 문학을 죽이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이 확장된 신체를 통해 접속되는 사이버 문학마저 문학 안에 포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문학 권력이 아닌 문학제도론으로서의 문학 비평 수여 제도에 대해 덧붙인다.
<해당 목차>
프랑켄 마르크스―사이보그 2000, 비유기적 신체의 현재
1995년의 기계 생물학 초고―마르크스, 프로이트, 다윈, 그리고 오시이 마모루
미래(학), 너무 멀리서 온 판단력―‘사이버 문학’의 가상성과 진정성
문학 제도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단상―수여(授與) 제도와 에콜 결사
문학의 끝에 대한 모든 소문과 선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말들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면, 그것은 시니컬하거나 절박한 고고학?문명론으로는 결코 포괄할 수 없는 것, 즉 우리가 지키려고 하거나 갱신하려고 하는 것이 ‘문학’이란 글자 위에 서려 있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