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국가이익만 철저히 챙기면서 우리 국가이익은 화려한 외교적 수사(rhetoric)로 덮어 뒷전으로 밀어놓는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적이나 적의 동지의 말 속에도 괜찮은 메시지가 담길 수 있습니다. 국익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을 놓쳐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들 말의 행간을 읽어내야 합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차마 대놓고 하지 못할 말은 에둘러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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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을 배울 때 은사님들로부터 “우리나라는 분단국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분단국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통일 문제를 잘 풀어나가려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북한의 국내정치와 경제 상황이 북중, 북소 관계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소 관계가 돌고 돌아 북한의 내부 정치 상황과 대남 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남북 관계만큼 국제 관계-외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돌아가는 분야도 없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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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오바마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은 수십 년 동안 통제됐고, 3대 세습이 가능한 곳입니다. 그만큼 폐쇄적인 사회이며, 북한은 바깥에서 자기들을 어떻게 보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접하고 북한 내부 주민들이 동요해서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북한 당국은 그렇게 될 때까지 손놓고 있을까요? 오히려 북한 내부의 감시, 감독, 통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해질 것이고, 그러면 북한 인권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또 북한 내부 통제가 강화되면 북한 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자를 거래하는 국경 지역 보따리장수들의 활동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당연히 생필품도 줄어들게 되겠죠. 미국식 사고방식으로는 생필품이 줄어들면 그 자체가 불만 요인이 되기 때문에 체제가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적 마인드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워낙 어렵게 살았던 세월이 길어서 이런 방식이 과연 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때 북한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라는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문구 하나가 그 시기를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북한은 이렇게 버틴 국가입니다.
--- p.66-67
한국전쟁 이후 계속 미국에 의존하고, 한미 동맹이 마치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생각하고, 미국과의 관계가 조금만 밀리면 나라가 망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한미 동맹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달리 보면 더 이상 한미 동맹을 격상시킬 수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최대치라는 것이죠. 물론 지금보다 한미 동맹의 위상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미국과 동맹을 강화한다는 것은 곧 미국의 무기를 많이 사주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에 돈을 많이 쓰면 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전용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가서 골프 카트 운전까지 하면서 역대 한국 대통령 중에 최초였느니, 최상의 대접을 받았느니 했는데 그때 돈이 엄청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당시 이명박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으로부터 ‘더욱 확장된 억제’(extended & extended deterrence)를 보장받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미국의 무기를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이 올라간 것입니다. 2015년 국방예산이 37조 5,000억 원 정도였습니다. 전체 예산의 15% 수준입니다. 여기서 한미 동맹을 더 강화하려면, 대체 국방비로 얼마를 더 써야 할까요?
--- p.76
야당의 무책임이 큽니다. 분단국가의 정치 지도자라면 최소한 이런 문제에 대해 자문을 받을 수 있는 싱크탱크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은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나름 확고한 통일 철학에 의존해서 버틴 셈입니다. 두 대통령을 정신적인 지도자로 삼고 있다는 뜻으로 두 분의 사진은 걸어놓고 있는 것 같던데, 정작 국정원 개혁 등 현안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야당은 자신들이 분단국가 정치인이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수권 야당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문제입니다. 적어도 제1야당이라면 통일 문제나 외교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있어야 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답습한다 하더라도, 그때와 달라진 국제정세에서 최소한 그걸 조리 있게 설명해낼 능력은 갖추어야 하는 겁니다.
--- p.132-133
현장에서 일했던 경험에 입각해서 살펴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구체적인 계획이나 대책을 가지고 미국을 설득하면 미국은 따라왔습니다. 북핵 문제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우선순위로 보았을 때 뒷전으로 밀려 있는 문제입니다. 미국은 북핵 문제에 관한 한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가동할 수 있는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plan) 같은 것도 없어요. 그들에게 북핵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 p.229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이 ‘원칙론’에서 벗어나 아량 있는 자세로 북한과 협상에 임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고조와 군사적 충돌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론이 통했다는 것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이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에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점을 평가해야 합니다. 청와대가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앞으로의 남북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가기 위해 지뢰 도발에 대한 북한의 시인·사과, 재발방지, 책임자 처벌 부문에서 유연성을 발휘했고, 북한은 여기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여러 사업들을 추진하자고 약속했다.”라고 설명했다면 어땠을까요? 불통 대통령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열린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 p.258
북한만 막으면 되고 미국만 등에 업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 겁니다. 외교나 안보 영역에서 자기중심성이 없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막말로 미국은 언제든지 우리 몰래 바람을 피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나’ 외에는 모두 ‘남’이라는 투철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성 바탕에서 냉철하게 국가 이익을 판단해야죠.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은 모두 이런 원칙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