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신앙의 자유라는 서구 전통을 확립시킨 것도 아니고, 근대적 개념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교황과 황제에 맞선 저항을 시작한 것도 아니다. 물론 1520년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말을 썼고 이를 얻고자 애썼으며, 이것이 훗날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운동으로 번지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 보자면 이러한 사상들은 그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의도적으로 논쟁의 장에 돌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종교개혁이 미리 짜여진 선동 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저술들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 p.19
루터가 없었어도 광범위한 개혁이 일어났을 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이유가 전부 루터나 비텐베르크에서 직접적으로 비롯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루터가 이 책에 등장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억측은 아니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상상마저 뛰어넘는 혁명이었으며, 선대 개혁자들이 의도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나아간 결과들을 근대사회에 남겼다. --- p.33
루터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바오로가 로마서(1:17)에서 하느님의 의로움righteousness 또는 정의justice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계시돼 있다고 한 의미를 여러 차례 고찰한 끝에 겨우 이해했다. 그 앞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바오로는 문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란 뜻의 복음에 대해, 신자들을 구원한 하느님의 권능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루터는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나쁜 소식’, 곧 그가 충족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할 수 없었던 의로움에 대한 위협적 기준이 될 수도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신학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에 관한 것이기도 했으며, 그에 대한 해답은 결국 새로 태어나는 것인 듯했다. --- p.50
마르틴 루터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자신이 번역한 성경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을 ‘루터의 성경’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가 있다. 그는 다른 어떤 책보다 성경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으며,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독일어 번역본은 (여전히 루터성경Lutherbibel이라 불리며) 거의 500년 동안 문화적 표상으로 계속 남아 있다. 루터가 직접 번역한 신약성경은 바르트부르크에서 3개월도 안 돼 완성한 것으로, 당시에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522년 9월 출판한 뒤로?그래서 ‘9월 성경’이라 알려졌다?석 달 동안 3000부에서 5000부가 팔렸고 12월에 재판 인쇄에 들어갔으며 다음 12개월 동안 100판을 넘겼다. 비텐베르크 성경이 나오는 1534년 이전까지, 루터의 신약성경은 20만 부가량 배포됐다. --- p.73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 구절의 의미를 강화하고자 원문에 단어 하나 더하는 일을 꺼리지 않았다. 논쟁이 되는 뚜렷한 예는 로마서 3장 28절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이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단어를 추가한 데 대한 비판에 대응해, 루터는 그것이 다만 본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일 뿐 아니라 훌륭한 독일어이며 번역한 문장을 더 명확하고 박력 있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했다. 번역본은 그리스어나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되어 있어야 하므로, 번역자는 라틴어 원문에 대고 어떻게 훌륭한 독일어를 할 수 있는지 물을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아이 엄마, 길에 있는 아이들, 장터에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 p.75
루터에게는 새로운 교회를 창설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개혁가가 되기로 명확히 결정한 뒤에, 그의 의제는 잃어버린 정통 그리스도교를 회복하는 것에 맞춰졌다. 그렇긴 하지만, 루터의 의제에는 신심 행위나 관례에서 사제들이나 평신도들이 저항할 만큼 충분히 혁명적인 변화들이 담겨 있었다. 프로테스탄트가 된 사람들로서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실천하게 된 셈이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조상들이 실천한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p.90
그리스도인들을 오도하고 기만하며 잘못된 믿음들을 수없이 불러일으키는 유해 서적들과 교리서들 중에서도, 개인 기도서들의 오류와 잘못이 결코 적다고 보지 않는다. 그 책들은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에 대해 조잡한 계산표를 주입시키고 고백성사를 보러 가게 하며, 그에 더해 하느님과 성인들에게 기도를 드릴 때 반反그리스도교적인 바보짓을 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러한 책들은 대사/면죄부에 대한 약속들로 부풀려져 있으며 붉은 잉크와 예쁜 제목들로 장식되어 나온다. 이러한 책들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않더라도 근본적이며 전면적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 --- p.103
떠돌아다니는 농민 무리가 지나간 자리가 황폐해진 것을 목격한 루터는 그들의 약탈 행위를 막는 데 필요하다면 제후들이 그들을 죽여버릴 수도 있다고 썼다. 그러나 살육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루터를 심하게 비판했으며, 루터를 설득해 이전 입장을 철회하는 글을 출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글은 오히려 평민들이 정부를 무시하고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있으므로 죽어 마땅하다는 그의 주장을 옹호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루터는 ‘철회문’을 쓰면서 이제껏 흘린 농민의 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제후들은 폭군일 뿐이라고도 했으나, 이 부분은 잊혀져 버리고, 그는 ‘제후들의 아첨꾼’이라 비난받았다. 평민과 통치자 모두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에 대해 가르쳤던 것뿐이라고 계속 주장했지만, 이러한 평판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 p.113
루터는 이미 앞서 발간한 소논문 서너 편에서 교황이 소집하는 공의회가 절대 자유롭고 열려 있는 토론의 장이 될 리 없다고 주장해왔지만, 슈말칼덴 조항으로 알려진 이번 증서를 통해 다시금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며 교황 제도는 교회에 아무 쓸모도 없고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악마에 의해 그러한 우두머리가 들어 올려지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의회에 대한 전망이 기회가 되어 루터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논문 「공의회와 교회」를 써서 1539년 출간했다. 그는 공의회 자체가 모순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개혁을 정초할 만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교회의 역사를 통해 논증했다. 공의회의 우선적 기능은 고대의 신앙을 지켜내는 것인데, 이는 이미 성경에 기초한 종교개혁으로 회복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황이 소집하는 공의회가 개혁가들이 복구하고 있는 정통 그리스도교에 이로울 리 없었다. --- p.118~119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평신도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들의 일상생활을 바꿔놓았다. 성인聖人들은 그들에게서 멀리 치워져 버렸고,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핀란드에서 에스파냐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행하던 성지순례 또한 억제되었다. 장관을 이루던 라틴어 미사는 설교 중심의 예배로 바뀌어,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눈보다 귀로 집중해야 했다. 평신도들은 지역 언어로 성가를 불렀으며, 성찬례가 거행될 때는 빵만 아니라 여러 세기 동안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포도주도 함께 영했다. 새로운 인쇄술 덕분에 문맹률이 낮아졌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성경을 소유해, 집에서 읽고 여행길에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