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는 누구였나? 그는 예언자들의 기대만이 아니라, 어쩌면 예수 자신의 기대까지도 실현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경배하도록 이방인들을 모아들일 자였다. 바오로는 그의 편지에서 이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여러 차례 드러냈으며, 강한 인상을 남기도록 편지 처음과 끝에 강조했다.--- p.11
간단히 말하자면, 바오로는 자신의 열성에 침착함과 훌륭한 판단력, 그리고 경영관리 기술을 결합했으며,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그의 신학에 사회적 실제를, 종교적 열정에 구체적 계획을 결합했다. 그는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 새로운 종교를 성립시키는 작업을 하기에 이상적인 사도였다. --- p.31
그리스도교 신학을 다시 기술하려 했던 주요 작업들은 흔히 바오로 서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고, 16세기의 마르틴 루터가 그러했으며, 20세기의 칼 바르트Karl Barth도 그러했다. 바오로 자신이 훌륭한 논객이었기 때문에, 그의 편지들은 그리스도교의 다른 형태들을 공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바르트는 분명히 바오로를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자신들이 처했던 환경에 맞추어 해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의도는 오늘날의 상황을 다루는 데 바오로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에 맞춰 재구성해보려는 것이다. --- p.42
수많은 고대인들에게 바오로의 메시지가 얼마큼 믿을 만한 것이었을지 현대인들이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지금 부활을 선포하는 설교를 들었다면, ‘그 사람이 정말로 죽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라든가, ‘부활이라는 건 대체 어떤 겁니까? 부활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라는 질문부터 던질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조금 더 늦은 시기에 제기됐으며,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바오로의 답변은 코린토1서 15장 36절-5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는 부활이란 영적인 몸에 관한 것이지, 육적인 몸, 곧 “살과 피”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불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앞에 제기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이 사람을 하늘나라로 들어 올렸으며, 주님으로 지명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 자신이 부활한 주님을 보았던 환시와 그분에게 받은 자신의 사명에 기대어 증언했다(코린토1서 9:1, 15:8). 많은 이들이 바오로의 말을 믿었고, 예수를 그들의 구원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54
바오로는 부활한 예수를 숨 쉬고 걸어 다니는 능력을 회복한 시신屍身이나 유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부활의 “맏물”이라 보았고(코린토1서 15:20),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활한 육체가 “물질적인” 몸과 같으리라는 생각을 부정하고, “영적인 몸”이 되리라는 의견을 견지했다(코린토1서 15:44-46). ‘물질적이지 않은 몸’이란 걸어 다니는 시신이란 생각을 배제하며, “영적인 몸”이란 유령(‘영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neuma)이란 생각을 배제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예수 자신의 경우처럼, 사람은 살아 있었을 때와 부활하고 난 뒤에도 한 개인으로서 연속성을 지닌다. 바오로는 이를 설명하고자 씨앗에 비유했다. 심겨질 때 씨앗 모양이었던 것이 자라서는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것이다(코린토1서 15:36-38). --- p.64
바오로는 유대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관점을 물려받았다. 첫째, 단 하나의 신, 하느님만이 있다. 둘째, 바로 이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 두 관점에 따르면 역사란 하나의 인형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많은 유다인들이 유일신 하느님 외에 이 세상에 있는 다른 힘들에 대해서도 생각했으며, 또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보통 매우 큰 규모로 행사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은 하느님이 의도한 대로 바뀌어갈 것이라고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다인들은 하느님이 일상의 삶에도 손쓰실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 소소한 일들까지 전부 반드시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 p.73
예수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여긴다면, 이때 그 죽음이 극복하는 인간의 문제는 바로 범죄transgression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고, 그에 대해서 용서받거나 사면돼야 한다. 사면되려면 피를 흘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봐왔듯이 바오로는 죄가 다만 규칙을 어기는 잘못된 행위라는 생각을 넘어서서 죄에 대한 관념을 더욱 철저하게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그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라고 하는 힘의 노예가 된 상태다. 개별적인 범죄들에 대한 회개와 보속은 인간 조건의 문제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은 유죄일 뿐 아니라 노예 상태에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바오로는 죄라는 힘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람은 죽어서야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생각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나누고, 그 결과로 속박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의 힘에서 자유로워져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해석을 두고 바오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여한 바가 바로 이 점이다. --- p.154~155
율법이 정말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새로운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옛 질서는 전체적으로 가치 없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도 바오로는 로마서 6장과 율법에 대한 견해를 사뭇 다르
게 제시하고 있다. 로마서 6장에 따르면, 율법은 사실상 죄와 같다. 우리는 이 진술을 과장된 것으로 본다. 더 섬세하게 표현하자면, 율법은 죄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비교했을 때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