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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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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년 06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44쪽 | 278g | 130*190*20mm
ISBN13 9791195572533
ISBN10 119557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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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늘 자다시피 했지만, 가끔 초점 없는 눈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도 있다. 내가 “엄마.” 하고 부르면 흠칫 놀라며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가 “요코예요.”라고 하면 잠깐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한 번 더 “요코예요.” 하면 꼼짝도 않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 “어머, 요코구나.” 하며 그제야 몸을 비튼다. 엄마가 한 번 더 “어머?”라고 말하면 나는 이미 요코가 아니다. 나는 엄마에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된다. --- p.17~18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었더라면 “낳아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같은 천벌 받을 말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혈육이란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게 되는 사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마는 것이리라. --- p.28

겨울에는 산에 장작을 주우러 갔다. 마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할머니 같았다. 나는 그 일을 즐겼다. 장작불 지피는 걸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을 짓는 것도 내 일이었다. 나는 불꽃을 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졌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불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여겼다. 퍼렇고 새빨갛게 몸을 비틀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솥이 끓어 넘치려 하면 붉은 장작불을 꺼내 뜬숯 단지에 넣어 끄면서 아쉬워했다. 나는 방화범이 될 소질이 충분했던 듯싶다. --- p.75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모두 잊었다. 나는 그 학교에 정말 가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고집을 피웠던 것 같다. 그래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몇 가지나 했다. 그러나 내가 얼마만큼 고
집불통이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희미할 뿐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스스로에게 편리한 것만 남기는 건가 보다. --- p.103

이제 엄마의 기억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주었던 기억도, 아버지와 싸운 일도, 심지어 아버지와 결혼한 사실도 모른다.
“엄마, 엄마가 결혼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요?”
“난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았어.”
“그럼 사노 리이치는 누구죠?”
“몰라.”
“엄마 남편이에요.”
“어머, 그래? 남편이라……. 무슨 그런 농담을…….”
내가 웃자 엄마도 재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엄마는 자식을 몇 명이나 낳았어요?”
“글쎄,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
일곱을 낳고 셋이 죽었는데.
“남자아이도 있었나요?”
“없었을 거야.”
엄마는 그토록 오빠를 사랑했는데, 그 슬픔도 잊은 걸까?
힘겨웠던 슬픔이 모두 사라진 걸까?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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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부모를 피하면서도 그리워한다.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이 행복과 충만함만으로 가득 차서가 아니다. 거기에 내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지상에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와의 사랑은 짧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끼리의 끝내려야 끝낼 수 없는 전 인생에 걸친 긴 사랑 이야기다. 복잡하고 모순에 가득 찬 사랑 이야기다.

정혜윤 (CBS피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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