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는 최초의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다. 남자를 타락시킬 정도로 사악하지만 매혹적인 여인을 가리키는 이 말은 19세기 말 유럽 예술계의 인기 있는 소재였다. 그러나 뱀을 만나기 전의 이브는 순수한 여인의 전형이었다. 클림트의 이브가 지닌 모습이다. 정절과 선의 승리를 대변하는 존재였던 이스라엘의 여자 영웅 유디트를 팜므 파탈의 전형으로 만들었던 클림트가 정작 팜므 파탈의 원조 격인 이브를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게 그려놓았다.
--- pp. 30~31
세기 말이라고 떠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다른 세기가 시작되어 벌써 이년이나 지났다. 지금에 와서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한 남성 화가의 그림을 해석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클림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의미를 찾겠답시고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도 무수한 자료를 찾아 헤맬 때도 마음대로 상상하면서 화를 내거나 감탄사를 연발하던 때에도, 그 물음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물어 본다.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장 어리석고 솔직한 대답에서 출발하자면,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일이 내겐 몹시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 대답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클림트의 작품 앞에 서면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저 감탄하고 또 감탄하게 된다. 그의 그림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비해 연구서가 많지 않은 것은 그래서 일 것이다. 클림트가 당대에 누리던 영광을 생각해 볼 때, 그가 오늘날 미술사나 예술 이론 쪽에서 그리 높게 평가 받지 못한 점도 이런 특징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은 미술사가의 것도 이론가의 것도 아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이론적 작업이나 분석의 필요성을 부정하려는 말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그 앞에 서서 끊임없이 감동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좋아하는 마음이 관심을 부르고 그 관심에 이끌려 작품의 의미를 배우고 찾아가고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예술 작품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 본문 중에서
나는 결코 자화상을 그린 적이 없다. 나 자신이 그림의 소재로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내 관심을 끈다. 하지만 사람들보다는 다른 소재들이 훨씬 더 내 관심을 끈다.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내게는 특이한 점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이다. …… 두번째로 확실한 사실은 내가 말이든 글이든 언어에는 재능이 없다는 점으로, 특히 나 자신이나 작품에 대해 뭔가 말해야 할 때 더 그렇다. 심지어 아주 간단한 편지를 써야 할 때조차 나는 공포에 질려 마치 배멀미가 난 것처럼 부들부들 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회화로든 글로든 내 자화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다지 유감스러운 일은 아니다.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물론 화가로서 나 말이다내 그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서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면 될 것이다.
--- pp. 5~6 클림트의 말 중에서
그의 생활과도 같았던 많은 여자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하나로 뒤섞이면서 하나의 얼굴이 되어 솟아오른다. 에밀리…… 그래, 에밀리. 나의 어머니, 나의 누이동생, 나의 연인, 나의 동지, 나의 친구, 그 누구도 아니고 그 모든 것이기도 한 나의 여인.
“에밀리를 불러줘.”
그는 힘겹게 말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녀가 달려오기를. 마돈나, 나의 침실로…… 27년간 내 옆에 있어준 그대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던 나의 침실로……
--- p. 118
<희망 1>은 놀랍고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분명하게 에로틱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임신한 여인의 누드가 외설적이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벌거벗은 그 여인이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한 남자와 관계해서 성(聖)스럽게 아이를 만들며, 더 이상의 남자는 필요치 않다. 매춘부나 팜므 파탈처럼 자신에게 돈이나 쾌락을 줄 수 있는 남자라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 존재와는 다르다. 19세기 말 남성들은 여성을 이렇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놓았고, 오늘날의 대다수 남성들도 이 이분법을 신봉한다. 그러나 <희망 1>에서는 이분법이 통용되지 않는다. 위협적인 얼굴들이나 화려한 장식들로 비중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림 속 여인은 몹시 관능적이다.
--- p. 170
<황금 물고기>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래쪽의 등을 돌리고 엉덩이를 내민 채 돌아보고 있는 여성에게 향한다. 그녀의 웃음은 몹시 애매해서 보는 이에게 성적인 암시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그림은 학부 그림에 대해 쏟아진 거센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한다. 제목도 원래는 '비평가들에게'였다. 비웃음과 도전의 느낌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그림은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클림트의 의지를 담고 있다.
--- p195.
<키스>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남녀의 포옹과 입맞춤을 그리고 있지만, 그 몽환적인 분위기와 신비로운 에로티시즘은 낯선 어딘가를 헤매는 느낌을 준다.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 끝없이 펼쳐진 우주 한 귀퉁이. 지금도 아니고 옛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래의 어느 때라고도 말할 수 없는 시간. 아니, 그 시간조차 멈추어진 곳에서 평온한 합일감에 도취된 연인이 있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손을 잡고 포옹하고 입맞춤도 하지만, 누가 그들처럼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오직 둘만 남는 ‘우주적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까.
--- pp. 12~13
<베토벤 벽화>는 클림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며, 유겐트슈틸 상징주의의 걸작이다. 그림을 보면, 물감(색채)과 금의 대조, 인물과 빈 공간의 대조, 그리고 직선과 회화적 요소의 대조 등 다양한 형태로 도입된 회화 기법에서 우선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가장 사랑받고 있으며 가장 감동적인 고전음악 중 하나인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시각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이 또한 매력이다. 특히 「제9교향곡」의 마지막 코러스 부분은 청중을 압도하는 힘을 발휘하는데, 이 작품은 그 힘을 담고 있다.
--- p. 85
<희망 1>은 놀랍고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분명하게 에로틱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임신한 여인의 누드가 외설적이고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벌거벗은 그 여인이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한 남자와 관계해서 성(聖)스럽게 아이를 만들며, 더 이상의 남자는 필요치 않다. 매춘부나 팜므 파탈처럼 자신에게 돈이나 쾌락을 줄 수 있는 남자라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 존재와는 다르다. 19세기 말 남성들은 여성을 이렇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놓았고, 오늘날의 대다수 남성들도 이 이분법을 신봉한다. 그러나 <희망 1>에서는 이분법이 통용되지 않는다. 위협적인 얼굴들이나 화려한 장식들로 비중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림 속 여인은 몹시 관능적이다.
--- p. 170
<황금 물고기>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래쪽의 등을 돌리고 엉덩이를 내민 채 돌아보고 있는 여성에게 향한다. 그녀의 웃음은 몹시 애매해서 보는 이에게 성적인 암시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그림은 학부 그림에 대해 쏟아진 거센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한다. 제목도 원래는 '비평가들에게'였다. 비웃음과 도전의 느낌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그림은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클림트의 의지를 담고 있다.
--- p195.
<키스>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 남녀의 포옹과 입맞춤을 그리고 있지만, 그 몽환적인 분위기와 신비로운 에로티시즘은 낯선 어딘가를 헤매는 느낌을 준다.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 끝없이 펼쳐진 우주 한 귀퉁이. 지금도 아니고 옛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래의 어느 때라고도 말할 수 없는 시간. 아니, 그 시간조차 멈추어진 곳에서 평온한 합일감에 도취된 연인이 있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손을 잡고 포옹하고 입맞춤도 하지만, 누가 그들처럼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오직 둘만 남는 ‘우주적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까.
--- pp. 12~13
<베토벤 벽화>는 클림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며, 유겐트슈틸 상징주의의 걸작이다. 그림을 보면, 물감(색채)과 금의 대조, 인물과 빈 공간의 대조, 그리고 직선과 회화적 요소의 대조 등 다양한 형태로 도입된 회화 기법에서 우선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가장 사랑받고 있으며 가장 감동적인 고전음악 중 하나인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시각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이 또한 매력이다. 특히 「제9교향곡」의 마지막 코러스 부분은 청중을 압도하는 힘을 발휘하는데, 이 작품은 그 힘을 담고 있다.
--- p.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