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가 진실의 뜻함을 아는가? …일러라!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이더냐? 귀로 듣는 것이 진실이더냐? 입으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는 것이 진실이더냐? 손으로 만지는 것이 진실이더냐? 그도 아니면 생각으로 뜻하는 바가 진실이더냐?”
*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것 또한 집착이며 번뇌일진데, 그날 이후부터 혜명은 애써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번뇌 망상이 올라오면 올라오는 대로 걷어내서 붓다께 공양 올렸다. ‘안·의·비·설·신·의’ 육근의 촉수 끝에 닿는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부유하는 티끌들을 올라오는 대로 건져서 붓다의 깊은 바다 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내 안의 부처에게 의탁하려 한 것이다.
‘부처님! 여기 번뇌 한 조각 있습니다.’ ‘여기 망상 한 보따리 공양 올립니다.’
* “법당에 곰팡이가 핀 것을 보고 삼천 년에 한 번 피는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난리를 치고, 신중단에 차려놓은 비스킷이 줄어들자 부처님이 드셨다고 떠벌리다가, 쥐가 물어간 것이 밝혀져 세상에 웃음거리가 되었지요. 그러고도 주지스님은 망신인 줄도 모르고 버젓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그 용감무쌍한 얼굴을 쳐다보며 얼마나 많은 불자들이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을지 짐작이 되오?”
“중들이 동양 최대는 왜 그다지도 밝히는지, 절마다 아파트만한 불상들을 만들어 세우느라 돈을 퍼붓고 있어요. 그 거대한 불상의 텅 빈 속처럼 불교는 비어가고 있어요. 나는 차라리 절에서 불상을 없애는 편이 옳다고 봐요. 정 법당이 허전하다면 탱화 한 폭 걸어두면 족해요.”
* 순지는 온전한 나신으로 보리밭 길을 건너와서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동석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봉긋하게 내민 젖가슴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동석이 순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소쩍새가 울었다. 소쩍새는 여기저기 옮아가며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제 울음을 울었다.
바다 속 깊이 가라앉았던 배가 몇 번인가 자맥질을 한 다음 이윽고 다시 파도 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로 누인 순지의 볼에는 댓잎 달그림자가 어른거렸고, 소쩍새는 여전히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제 울음을 울었다.
* “가장 놓기가 어려운 번뇌는 무엇이었습니까?”
혜명은 한참을 더 침묵하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입 밖으로 밀어냈다.
“그리움…….”
“무엇을 그리도 그리워하셨습니까?” 덕운이 혜명의 시선을 마중했다.
* 분별심이란 사람의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용심으로서 호, 불호와 미추와 희비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분별심에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비롯되고, 그로 인해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온갖 부정부패, 시기, 질투, 원망, 자기비하, 열등감, 불안, 초조, 등 행복과는 동떨어진 마음이 되어서, 마침내는 삼계가 불타는 화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분별하고 시비하는 동안 산과 들에서, 깊은 물속에서 들짐승과 물고기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누리며 살지요.”
* “신이래도 좋고 연기緣起래도 좋아. 신에 의해 창조됐든 연기법에 의해 지어졌든 다를 것이 뭐가 있겠소? 성경에서 ‘하느님’이라 적힌 자리에 ‘연기’로 바꾸어 써넣거나, 붓다의 가르침 중에 ‘연기’를 ‘신’으로 말을 바꾸어서 어색할 것이 없지 않으냐 그 말이오. 신이든 연기든 그 속성의 발현은 무한한 능력이잖소? 여기에서 진리 간에 무애한 경지가 나타나는 거지. 진리가 둘이면 그건 진리가 아니거든. 다시 말해서 포장만 다를 뿐 결국 하나란 얘기지.”
* 붓다가 말한 ‘무아’와 ‘환생’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나란 주체가 없는데 무엇이 윤회를 하며 어떻게 환생을 한단 말인가? 이전의 나는 무엇이며 환생한 나는 누구란 말인가? 그랬었는데 네 가지 정신 현상 즉, 무색온의 상속으로 이루어지는 ‘무아윤회’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던 두 개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란히 서는 것이 아닌가? 덕운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십 년이 넘게 품었던 의문 덩어리 하나가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