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부하 직원이 남자로 보일 때
진짜 긴급사태는 밤 10시를 넘은 시각에 발생했다.
아사코는 미나코에게 영향을 받아 사랑이 찾아올 수 있는 환경이라도 구축하려는 마음으로, 일전에 만난 조금은 멋진 영업맨의 마음을 끌기 위해 ‘여성을 위한 주식투자’에 관한 기획서를 쓰고 있었다.
잔업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외국계 기업인지라, 상근하는 30여 명의 정사원과 계약사원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사무실에 지금은 아사코 혼자 남아 있다. 그때 뜻하지 않게 전화벨이 울렸다.
“넥스트 콘텐츠 사업부입니다.”
아사코가 전화를 받자, 주뼛거리며 얕은 기침을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끔 걸려오는 오타쿠족의 극도로 전문적인 질문이거나 복잡한 클레임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처리하려고 아사코가 가볍게 자세를 고쳐 앉자마자, 상대방은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
“그쪽 사이트 다운됐어요.”
아사코는 즉시 컴퓨터 화면을 자사 웹사이트 초기화면으로 바꿨다. 상대방의 말대로 어떤 화면도 먹통이었다.
전혀 의미가 없는 클릭과 리셋을 되풀이해보지만, 그건 아무런 해결책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사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마치 키홀더를 차 안에 그냥 두고 귀가했을 때,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문손잡이를 찰칵 찰칵 돌려볼 때와 똑같은 심정이다.
오타쿠족 남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최선을 다해 빠른 시간 내에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약속한 후 전화를 끊었지만, 엔지니어들은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방치해 둔다면 광고 클라이언트의 심한 클레임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 그러면 사죄 정도로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니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아사코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는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야근을 하고 있을 게 뭐람?”
운이 나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커리어 업 한답시고 낯선 매체로 전직한 게 잘못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이게 잡지 교정을 다 본 후에 발견된 실수라면, 제작과정이나 시스템을 전부 꿰뚫고 있어 최소한 자신이 어떻게든 처리해 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앞뒤를 쳐다봐도 캄캄한 절벽뿐이다. 어차피 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은 아날로그에 흠뻑 젖은 세대가아니던가. 아사코는 마음을 가다듬고 휴대폰 연락처를 뒤져, 사내에서 이러한 사태에 대응이 가능한 이름을 찾아본다. 아무튼 누구라도 찾아야만 한다.
그때 카드 키로 사무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노부유키가 들어왔다.
“어? 과장님 아직도 계세요?”
자기 말고 아무도 없는 저녁 늦은 시간 사무실,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혼자서 불쑥 되돌아왔다. 평소의 아사코라면 그 찬란한 우연을 신께 감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공교롭게 상사로서 아주 폼 나지 않는 장면이 부하 직원에게 발각되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좌불안석인, 믿음직스럽지 못한 상사의 태도를 노부유키에게만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노부유키 씨야 말로 퇴근한 게 아니었어?”
만일 그가 잊어버린 물건을 가지러 온 거라면 이 비상사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힐끔 쳐다보니 노부유키는 햄버거 가게의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과장님이 말씀하신 온천여관 기획서 말인데요, 오늘 중으로 다시 써야겠어요. 물론 한자가 틀리지 않게 조심할거예요.”
검정 스웨이드의 BEAMS 재킷을 벗고 봉투에서 치즈버거와 커피를 꺼내 컴퓨터 앞으로 향하는 노부유키를 보고 아사코는 버틸 마음을 접었다.
“있잖아, 노부유키 씨. 실은 우리 회사 사이트가 다운됐거든.”
“예? 정말요?”
노부유키는 이제 막 앉은 책상 앞에서 홈페이지에 발생한 문제를 재빠르게 훑어본다.
“우와! 화면도 그렇고 배너도 전멸이네요. 데미지가 큰데요.”
“그러게 말야. 엔지니어들도 전부 퇴근하는 바람에 도와줄 사람도 없고, 혹시 노부유키 씨가 아는 사람 없어?”
노부유키는 그녀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다.
아사코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져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모처럼 둘만의 기회가 왔는데, 이런 쓸데없는 말만 하고 있다니.
“하필이면 이럴 때…. 난 운도 되게 없나 봐.”
그녀가 중얼거리듯 작게 말하자, 입을 다물고 있던 노부유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꼭 그렇지도 않아요.”
“응?”
“과장님의 운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요.”
노부유키는 언제나의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정도 에러라면 저도 고칠 수 있어요.”
아사코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 컴퓨터 프로그램 잘 알아?”
그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벌써 노부유키는 IT사업부서 쪽으로 가더니, 엔지니어전용 컴퓨터에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있다.
“이래봬도 대학에서 이공계 전공했어요. 오랫동안 컴퓨터 시스템 공부만 했죠. 먼저 있던 회사에서도 시스템 엔지니어를 맡았고요.”
노부유키는 능숙하게 보수작업을 계속하면서 검정 티셔츠의 긴소매 양쪽을 훌훌 걷어 올렸다.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의외로 근육질 팔이 아사코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노부유키가 이처럼 단단한 팔을 지니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근데 똑같은 IT관련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서 콘텐츠 제작팀에 지원했거든요. 그래서 한자에
약해요. 물론 변명이지만요.”
“그랬어? 난 전혀 몰랐어.”
아사코는 노부유키의 곁에 앉아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렇지만 화면상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문외한이라, 키보드를 조작할 때마다 미묘하게 움직이는 노부유키의 근육만 줄곧 바라보고 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노부유키는 언제나처럼 미덥지 않은 부하 직원이 아니라 일처리가 능숙한 어른 남자다.
만약 무인도에 둘만 남게 되어도, 노부유키라면 어떤 문제든 앞서 헤쳐 나갈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야말로 보통 사람을 초월하는 위기관리 능력이 겸비된 아사코의 이상형이다.
“다 됐어요.”
홈페이지에 캠페인 중인 상품의 영상이 무사히 흘러나왔을 때는 벌써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사코는 뭔가 중대한 고비를 둘이 힘을 합쳐 극복했다는 충실감에 휩싸이면서 익숙한 자기 자리로 되돌아왔다.
“고마워!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아사코는 만일 허락된다면 노부유키에게 안기고 싶을 정도였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뭘.”
노부유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책상에 줄곧 놓여있던 치즈버거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에 들었다.
“아냐, 그래도 뭔가 보답하지 않으면 내 맘이 편치 않아.”
양보하지 않는 아사코의 말에, 노부유키는 이미 식어빠진 햄버거를 포기하고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면 다음에 밥 한 끼 사주세요.”
“알았어. 꼭 그럴게.”
둘 만의 첫 식사를 아사코가 사다니, 미나코가 들으면 엄청 잔소리를 해대겠지만 어쨌든 첫 데이트 약속을 잡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노부유키가 말한 대로 그렇게 운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사코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외부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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