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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을 품은 나리송이

랑을 품은 나리송이

이미은 | 뮤즈 | 2016년 07월 0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4 리뷰 3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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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7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432쪽 | 490g | 140*210*22mm
ISBN13 9791104908576
ISBN10 110490857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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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화의 서막

하늘신의 딸, 일화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늑대에게 말했다.
[비천하고도 비천한 늑대여, 한낱 요괴에 불과한 네게 영생을 주마.
만물이 신으로 떠받들게 해주겠노라.]
가느다란,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에 늑대가 비웃었다.
영원이 무(無)와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신? 그보다 더 재미없는 단어는 없을 듯하다. 무용(無用)하다.
그러자 일화는 소리 높여 웃었다.
깔깔깔……. 고귀한 하늘신의 딸은 요부처럼 웃다, 이내 뚝 입을 다물었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 조심스럽게 쓸며 일화가 말했다.
[하면 반려를 주마.]
네게, 온전한, 반쪽을 주마, 외로운 늑대야.
그러니 맹약을, 깨지 못할 피에 대한 맹세를.

언제나와 같이 대낮의 주점엔 사내들이 가득했다. 빠르게 정보가 오고가는 곳답게, 사내들은 서로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둘 늘어나는 술잔과 함께 풀어냈다.
“몇 달인가 전에 전염병이 돈 마을 말이네. 결국 살아남은 이가 없다더군.”
“쯔쯔. 망조야, 망조. 호국에 망조가 든 게야.”
나라 욕을 하며 허공에 부딪친 잔들이 수십이었다. 한 차례 술잔을 다시 채우자, 이미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 사내가 어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정보를 입에 올렸다.
“망조라니 생각났는데, 다들 들었는가? 얼마 전 황녀가 가례를 올렸잖은가. 그게 실은 황비가 한 짓이라더구만. 그, 선황은 황녀를 차기 여황으로 지목하셨는데, 선황이 죽은 다음 황비가 날름 옥새를 낚아채고 황녀를 쫓아낸 거라던데?”
성인이 된 황족만이 황좌에 앉을 수 있기에 불거진 문제였다. 이전에는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랑(狼)의 가주가 다음 황제가 될 이의 뒤를 봐주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었다. 성인이 된 자만 황좌에 앉을 수 있다는 불문율에도 호국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그 가주가 제 책임을 방기한 것이 벌써 수십 년이었다. 금가기 시작한 균형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법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선황이 지목한 황녀가 황위계승권을 잃은 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내의 말에 몇몇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잠시 스쳐 갔다. 물론 안타까움은 길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다른 세상 얘기였기에, 그들 중 꽤나 오래 수도를 떠나 있어 소식을 늦게 접한 사내 한 명만 인상을 쓰며 투덜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되는 건가 몰라. 그 왜, 황족들은 궁에서 나온 적이 없지 않은가.”
“거 높으신 분들이 무슨 생각인지 알게 뭔가. 우리 같은 놈들이야 이 난리통에서 당장 배 채우는 게 문제지.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그 거창한 혼례를 못 봤지? 그런데 그 상대가 랑(狼)가의 가주라는 얘기는 들었는가?”
그 말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사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 쿨럭 쿨럭! 무에? 늑대신 말인가? 아니 어찌 천신의 후예와 늑대신이 가례를 올린단 말이야?”
“에라이, 이 사람 순진한 것 보게. 세상천지 신이 어디 있는가! 그것들 다아 헛소리야, 헛소리. 꾸며낸 얘기다, 이 말이지.”
“쉬이! 미쳤나. 황족들은 신이여! 그 머리칼이며 눈이며 땅의 것이 아니잖어. 게다가 ‘하늘’을 움직…….”
잔뜩 겁먹은 사내의 모습에 주변에서 잇따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낮부터 술을 입에 퍼다 나르는 사내들의 목청은 걸걸해서, 순식간에 주점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그중에서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두 사내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또 다른 사내가 술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푸흐하핫! 저 사람은 어디 동굴에 처박혀 있다 나왔나. 보게, 내가 상단 일을 하는데 말일세. 저― 먼 서역 어딘가엔 갈색 머리통이 흔해 빠졌다네. 그 피가 이어진 게지. 그리고 ‘하늘’이라고? 푸하하! 사람이 비를 내리고 천둥을 친다고? 그걸 대체 누가 보았단 말인가. 정녕 황족들이 신의 후예라면 어찌하여 작년 가뭄 때 비를 내려주지 않았단 말이야? 여태껏 그걸 믿는 순진한 인간이 과연 있을까 싶었더니 바로 예 있었구만그려.”
상인이라 스스로를 밝힌 남자의 박장대소에 이번엔 주모가 얘기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물 묻은 손을 치맛자락에 대충 문질러 닦고는 상인의 등짝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철썩! 살갗이 맞부딪치는 찰진 소리 사이로 사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왜, 왜 그러는 게야!”
“예끼! 예서 하늘이 노할 얘기 하지 마! 저 예국에서 수룡을 부리는 이가 수신에게 가서 약을 받아왔다는 얘길 아직도 못 들었어? 신이 노해서 내 가게에 벼락이라도 떨어지면 등짝으로는 안 끝날 줄 알어!”
“아이고, 아 거참 신이 어디 있다고 이 난리야, 난리가! 아파 죽겠네.”
상인이라 스스로를 칭한 사내는 사내들 중에서도 복장이 꽤나 멀끔해서, 겁을 집어먹었던 사내가 주모의 눈치를 보며 슬쩍 운을 뗐다.
“하면 그, 황자는 뭐란 말이오.”
뜬금없는 질문에, 상인은 얼얼한 등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황자가 왜?”
“거 황족들이 머리 색이며 눈 색이 서역에서 온 것이라면 황자는 뭐냔 말이오. 듣자하니 황자는 머리고 눈이고 시꺼멓다더만. 우리들처럼. 그럼 황자는…….”
사내는 여기서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처럼 황비가 사통(私通)해 낳은…….”
사내의 말은 우물거리다 입안으로 숨어버렸다. 주모의 매서운 눈빛에 겁을 집어먹은 탓이다. 그러나 이미 뱉어진 말만으로도 뒷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만한 것이라, 상인은 눈을 반짝이면서도 꽤나 근엄한 척 턱을 쓸어내렸다.
“흐음. 글쎄, 모를 일이지. 황비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것일 수도 있고.”
상인의 의견에 사내들이 웅성이며 서로 머리를 맞댔다. 해가 쨍하니 떠 있는 하늘 아래에서 술안주로 높으신 분들의 부정 얘기보다 더 맛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웅성거림 사이에서 의견은 대체로 둘로 나뉘었다. 황비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들과, 황자가 무능력해 까만색을 갖고 있다는 쪽으로. 사내들의 반응을 즐기듯 상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뭐냐, 황족들 중에는 검은 머리도 몇 있었다 하니 아닐 수도 있고…….”
“아 거 맞다는 거여 아니란 거여?”
한 사람이 짜증을 내자 상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를 일이지. 그걸 내가 어찌 아나? 배 맞은 인간들이 알 일이지.”
에라이, 모르는데 왜 그리 말을 질질 끌어?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몇몇이 불평을 늘어놓자, 상인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는 술을 가득 채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의뭉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황비가 정신이 나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한데 참으로 이상하지. 왜, 십 인의 열사 말일세. 고관대작이 하나도 아니고 열이나 목이 잘렸어. 왜 그랬을까……. 황비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아하! 그러고 보니 황비 외가가 그, 뭐냐, 무가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허어, 그게 또 그리되는구먼.”
십 인의 열사 하면 얼마 전 치러진 황녀의 가례 다음으로 저잣거리에서 유명한 얘기였다. 정통한 계승자인 황녀를 밀어내고 억지로 가례를 진행시킨 황비에게 맞서다 정의롭게 목숨을 잃은 열 명의 고관대작. 그들의 영웅적인 행보에 대한 얘기는 암암리에 호국 전역으로 퍼진 지 오래였다.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말은 술에 취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내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시뻘건 얼굴들과는 달리, 서로 주고받는 목소리는 낮고 또 진중했다. 그런 사내들의 모습에 상인은 남몰래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대낮에 주점에 모인 사내들. 이들 중 절반은 보부상이고, 이야기꾼이고, 상인이었다. 말을 전하고 퍼뜨리는 이들. 소문을 내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으리라. 웅성거림 중에 퉁명스러운 말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황녀는 무슨 죄람!”
이번에는 주모도 말리는 대신 혀를 차며 가여운 황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소문은 그렇게 퍼진다. 작은 의심에 누군가가 돌을 던지면, 거기에 살이 붙고 덩치가 거대해져 저잣거리를 휘감고 도는 것이다.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 이들은, 술상에 돈을 올려놓은 상인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중략)
초봄, 아직 겨울의 추위가 전부 가시지 않은 그날은 호국의 적통 계승자이자 제1황녀인 호 시연이 궁을 나서는 날이었다. 하늘도 배다른 오라비에게 제 자리를 빼앗기는 신의 후예를 가엾게 여기는지 혼례의 서막이 오르자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황실의 혼례였기에 새빨간 색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고작 열여덟, 혹은 열아홉쯤 되었을 황녀는 무심한 시선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과,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궁녀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바라‘봤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저 고개가 그쪽을 향했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 터였다.
세상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치 않는 가례를 올리고 있음에도, 황녀의 얼굴엔 한 줌의 슬픔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완벽한 무관심이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객관적으로 황녀의 삶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다. 황녀가 여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성년식을 맞이할 때까지 등 뒤에서 지켜줘야 할 선황은 의문사했으며, 황녀를 잉태했던 황후는 황녀를 낳은 뒤 사망하였으니 기댈 곳 없는 황녀는 고작 3년을 버티곤 제위 다툼에서 밀려나 버렸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황녀는, 아무런 힘이 없었기에.
‘황비마마! 이리할 수는 없습니다!’
‘황족이 궁을 나서는 일은 전례에 없던 일이옵니다!’
황녀의 편에 서 있는 그녀의 외가와 무수히 많은 권문세가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으나 이미 옥새는 황비의 손안에 있었다. 고작 마흔 줄에 들어서는 황비는 궁에 남은 유일한 어른이자 관을 쓰지 못한 황제였기에, 그녀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하나하나 제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전국의 유생들이 올린 수많은 상소문들은 모두 내쳐졌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높이던 문인들은 황비의 편인 무인들의 앞에서 차례로 목이 떨어졌다.
그 누가 붓이 검보다 강하다 하였는가? 글로써 부당함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는 문인들을 비웃듯, 고관대작 열의 목이 가장 먼저 떨어졌다. 세간에선 그들을 십 인의 열사(烈士)라고들 치켜세웠으나 이미 죽은 이는 저들의 이름 석 자가 역사에 아로새겨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호국의 건국 때부터 흥망성쇠를 같이한 고관대작들의 목마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유생들은 입을 닫았다. 몇몇은 호국에 망조가 들었다며 스스로 목을 맸다. 이름을 남긴 이가 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 수십이 죽어나간 뒤에야 날카롭게 벼려진 검 앞에서 문관들은 파리한 안색으로 물러섰다.
그리하여 호국의 역사상 없던 혼례의 서막은, 양손으로도 모자랄 만큼 수많은 이의 목이 떨어진 뒤에야 오를 수 있었다. 황족의 비밀을 아는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모든 문무관이 이번 혼례에 대해 가진 생각은 같았다. 황녀를 궁에서 쫓아내는 부당한 혼례. 그러나 모든 권력자가 올바른 선택을 하던가.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약과 술에 취해 일생을 낭비한 호국의 선황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권력을 쥔 자가 곧 정의였고, 역사였다. 황후는 황녀를 밀어내고자 했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황후의 밑에서 단지 그들은 선택을 했을 뿐이다. 검을 쥐고 있는 황후의 뜻에 반대해 목을 내밀지, 아니면 그 입을 다물지.
이것이 황실에서 가장 귀한 적통의 피를 이은 황녀가 랑(狼)가로 쫓겨나듯 혼례를 치르게 된, ‘세상’이 알고 있는 이유였다. 명분은 아이러니하게도 궁내에서 몇 번이고 죽을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황녀의 신변보호였다.
톡, 톡, 쏴아아─.
“비가…….”
몇 방울 떨어지던 것이 일순간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자, 시연은 연지를 칠해 열매처럼 붉은 입술을 달싹여 중얼거렸다. 봄비라 가벼이 넘기기엔 그 양이 많았다. 그러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서 있는 신부에게 비를 피하라 불러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보다 신분이 높은 자뿐이었다. 귀한 황녀가 비를 맞기 시작하자 내관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 놓여 있는, 신부가 떠나기 전까지 자리를 지켜야 할 황비의 좌(座)는 텅 비어 있었다. 혼례가 치러지는 곳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황비가 새삼 황녀가 비 맞는 것이 걱정되어 달려올 리 없음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모르는 자는 없었다.
하여 비를 막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붉은 천자락 하나뿐이라, 자그마한 어깨는 시간이 흐름에 점차로 젖어들었다. 솜씨 좋게 땋아 위로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카락은 빗물을 머금으며 무게를 더해가고, 겹겹이 꽂힌 장신구는 전부 금과 보석 일색이라 그 무게가 상당해 황녀를 빛내기 이전에 그녀가 서 있는 것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하여 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도착한 신랑이 가장 처음 본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다.
호국에서 가장 존귀하나, 가장 비참하게 버려져 찬비가 내리는 날 그것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황녀.
텅 빈 두 눈이 가장 먼저 사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빗물을 머금어 색이 진해진 옷감이 그 다음으로 눈에 밟혔다. 그대로 턱을 들어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가녀림이 그의 온 신경에 그대로 가득 들어찼다.
그 모습이, 이젠 흐릿해져 있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해 사내는 잇새로 제 감상을 짓씹듯 뱉어냈다.
“빌어먹을.”
별생각 없이 서 있는 황녀와, 저만의 해석을 덧씌운 사내의 첫 만남은 그렇게, 완벽한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성사되었다.
열아홉이라 하였나. 그는 듣고 싶지 않았으나 들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으나 기억하고 있는 제 어린 신부의 나이를 떠올리며 낮게 혀를 찼다. 협박에 의해 반쯤 떠밀려 하는 혼례였기에 한 자락의 관심도 줄 생각이 없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세상에 던지는 무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제 가슴팍에나 겨우 닿을 법한 자그마한 여인의 세상을 다 산 듯한 얼굴엔, 시선이 가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옆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내관이 희게 질린 얼굴로 무어라 말을 하였지만, 사내는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넓은 보폭으로 황녀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법도에 따른 순서가 있다는, 등 뒤의 절박한 외침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네모지게 깎아 만든 돌길을 걷는 발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마치 내달리듯 걸어간 그는, 시연이 손에 닿을 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제 몸을 감싸고 있던 우의(雨衣)를 벗었다. 의장에 흔히들 있는 장식처럼 어깨 바로 아래에 달려 있는 단추를 풀어내고 한 손에 그 긴 우의를 걷어내는 모양새가 날렵하여, 궁녀들 몇이 잠시 숨을 죽였다. 검만 잡았을 것 같은 거친 손으로 제게 맞춰진 우의를 몇 번 착착 접은 그는, 이내 한쪽 무릎을 숙여 황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사내의 손길을 따라 반투명한 우의가 가볍게 허공을 부유하다, 이내 여인의 가녀린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 섬세함에 다른 궁녀들마저 놀람을 금치 않는 순간에도 무심히 저를 빗겨나가는 시선에 사내의 손이 황녀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둥그런 귀에 꽂아주며 제 존재를 알렸다.
“내 부인될 존귀한 이의 이름은 무엇인가.”
사내가 이미 익히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을 던지자, 허공을 향하고 있던 시선에 초점이 돌아왔다. 다짜고짜 모든 순서를 건너뛰곤 혼례식의 마지막 순서를 밟고 있음에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내관이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바야흐로 전례에 없던 혼례의 엄중한 절차마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지적할 정도로 시연은 이 혼인에 애정도, 열정도 없었다. 절차 따위야 전부 뒤집어지더라도 어떻단 말인가. 귀한 황궁의 법도 따윈 개나 주라지. 그렇게 여인은 저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사내를 보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
“호국의 적장녀(嫡長女), 호 시연이라 합니다. 하면, 초면에 이리 말을 낮추는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핫! 그래, 내 결례를 범했군. 사죄드리지요, 황녀마마. 랑가의 수장, 랑 키안이라 합니다.”
호국에서는 익숙지 않은 방식의 이름, 그러나 그렇기에 머리에 박혀 칼로 새긴 듯 잊을 수 없던 이름.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색소가 옅은 연갈색 눈동자와 짙은 회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만났다.
그제야 그녀는 그의 외양을 눈에 담았다. 짧게 쳐올린, 늑대의 갈기를 닮은 짙은 회색 머리칼과 제게 와 박히는 회색 눈동자까지 천천히 그녀의 세상에 가득 들어찼다. 시연의 얼굴에 점차로 표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뜨인 두 눈과, 그 안에서 반짝이는 호기심과 흥분. 그리고 창백했던 볼에 혈색이 돌자 키안은 조금은 놀라움을 느끼며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산 것 같던 여인이 제 나이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에 순수한 감탄을 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이 호국이 건국된 이후로 540여 년간 나이를 먹지 않은 채 랑(狼)가를 이끌어온다 말해지는 랑 키안과 호국의 마지막 남은 황족, 호 시연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꽃을 띄운 술잔조차 서로 나누지 않은, 둘의 혼례 날이었다.
(중략)
그날은 지상의 모든 신들이 들썩인 날이었다. 하늘신의 딸 일화가 부정을 저질러 아비에게 버림받고 땅으로 도망친 날. 사는 곳이 확연히 달라 서로 마주칠 일 없던 하늘신을 보기 위해 지신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쭉 뺐다.
아비에게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도망친 일화를 보러 모인 이들은, 그러나 이내 달큰한 향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일화의 사정을 듣고 걱정스러워하던 지신의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던 지신은 이를 드러냈다.
하늘의 피.
그동안 한 번도 마주할 일 없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 달큰한 유혹. 손바닥을 뒤집듯 호의가 열망으로 뒤바뀌었다. 그렇게 지신들이 하나같이 일화의 피를 노리고 있을 때, 유일하게 홀리지 않은 이가 있었다. 일화는 저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늑대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면 네게 반려를 주마, 외로운 늑대야.]
일화의 말에 늑대는 뾰족한 코를 그녀의 배에 들이밀며 킁킁거렸다. 허공에 가득 배어 있는, 생명이 꿈틀거리는 선연한 냄새가 코끝을 가득 채웠다.
그 대가는 무엇이지? 늑대의 물음에 일화의 붉은 입술이 뒤틀렸다. 그녀는 늑대의 털을 쓰다듬고 있지 않은 손으로 봉긋한 배를 쓸어내리며 답했다.
[이 아이를, 내 피가 위협받지 않길. 번영하길. 위험은 걷어내고 오로지 평안함만 존재하도록, 그 길을 지켜주고 수호하며 같이 걸어라.]
이제 만삭의 티가 만연한 일화의 주위엔 달큰한 향을 맡고 새로이 모여든 요괴들이 하나같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탐이 나는 피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너무 탐이 나 정신마저 아득해질 것만 같구나.
그러나 지금 일화는 강했다. 탐욕스러운 눈을 한 채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수십, 수백의 요괴에 둘러싸인 일화는 제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는 생각들을 밀어냈다. 하늘신이 가장 아끼던 막내딸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그녀는 요괴들의 생각이 너무 천편일률적이라 생각했다. 그래. 지금 자신은 강했다. 그들이 감히 손조차 뻗지 못할 정도로.
그리하여 강하고 아름다운 하늘신의 딸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녀의 주위에 원을 그리며 둘러싸곤 기다리고 있었다.
때를.
하늘신의 딸이 약해지는 순간을. 출산이 시작되는 그 순간을.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시선들에 둘러싸인 채, 유일하다 할 수 있는 무심한 두 눈에 마음 깊숙이 위로받으며 일화는 말을 이었다.
[내 두 팔을 주마. 내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라. 내 두 다리를 주마. 내 아이의 나라가 번영토록 하라. 내 몸을 주마. 비천한 것들이 감히 내 아이를 탐하지 못하게 하라. 내 머리를 주마. 내 아이를…… 천(天)에게서 감추어라.]
노래하듯 음을 타고 이어지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한층 낮은, 동시에 색이 선연한 한마디가 잠시간의 침묵을 다시 뒤덮었다.
그것이 대가이다.
연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기꺼이 저를 내어놓겠다 말하는 어미를 보던 늑대는, 경외심을 담아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일화는 늑대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다시금 맹세했다.
[그리하면 늑대야, 내 네게 반려를 주마.]

“춥지 않으십니까.”
옆에서 나란히 나아가던 가마의 창이 열리고 물음이 던져진 것은 그즈음의 일이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그는, 기억 속 여인을 빼닮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고작 추위에 약해질 몸이 아니다. 그러나, 부인은 고뿔이 들 수 있으니 창을 닫는 것이 어떠한가.”
혼례를 끝냈다고 곧바로 낮춰지는 말은 퍽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곳엔 애정 한 줌 없었기에 창을 여느라 밖으로 내밀어졌던 희고 가는 손이 움찔 떨렸다. 그 미비한 떨림에 잠시 짙은 회색빛 시선이 가 닿았지만, 아무런 대꾸 없이 창이 닫히자 키안 역시 제 관심을 덜어냈다.
창이 닫히고, 가마 안에 앉아 있을 시연이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되자, 뒤에서 언제고 끼어들까 눈치를 보던 사내 하나가 말을 재촉해 주군의 바로 뒤로 바짝 따라붙으며 입을 놀렸다.
“주군, 부드럽게 하십시오, 부드럽게. 사정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리도 냉하십니까그래.”
“사정을 다 아니까 그렇다.”
“거 참…… 다 알고도 그러신다니 주군께서는 참으로 변태같으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신부의 나이가 열아홉이라 하였지요. 하핫, 조혼(早婚)도 아니고,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갓난아이를 신부로 맞이하시다니, 그런 면에서는 변태가 맞긴 한데 말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쓸데없는 말을 아주 당당하게 해대는 태하의 발언에 키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열아홉이라면 여인의 혼례 시기로는 그리 빠른 것이 아니라는 점도, 조혼이 열 살 아래의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여아를 데려오는 것이라는 것도, 그 외에도 지적할 것은 많았으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의욕은 없었기에 그는 줄줄이 늘어질 말을 짧게 축약했다.
“그 입, 다물어라. 시끄럽다.”
세상의 말들은 보통 몇 가지 의미로 이어지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너무하십니다, 주구운!”
“다물기 어렵다면 베어주랴?”
“그리하시면 아마 주군께선 요마(妖魔)의 숲에 가실 때마다 충신들의 참언에 귀가 따가우실 겝니다.”
게다가 경사스런 혼례 날 어찌 피를 본단 말입니까. 헤실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지금 네 목을 붙여놓는 유일한 이유라는 걸 잊지 마라.”
“예, 예. 어쩌겠습니까. 주군의 책사께서 부인될 이를 반드시 보고 오라 했는걸요.”
당사자 앞에서 당당하게 저보다 제 책사의 명이 더 중하다는 듯 말하고 있는 놈을 어찌해야 할까 키안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가 무어라 언질을 하기도 전에 주변을 살핀 태하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인간들의 의식일 뿐이지만 말이죠.”
인간 식으로 하는 가례는 어차피 저들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냐며 태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다들 어찌나 걱정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린은 결계에 구멍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니까요. 제 형님은 요마의 숲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귀하신 황녀께서 어떤 여자인지 보고 일러주겠다고 약조를 했죠.”
밑에 있는 이들의 걱정을 모를 일도 아니었으나 주제를 잊고 넘나드는 것까지 눈감아줄 정도로 그는 그리 자비롭지 않았기에, 키안은 흉흉한 기운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다음 방문 때, 두 놈 다 한동안 자리보전하게 될 줄 알고 있거라. 소하에게도 그리 전해.”
다음번에 어디 한두 군데는 부러뜨려 놓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태하는 겁에 질려 벌벌 떨기는커녕 좋다고 킬킬 웃었다.
“약조하셨습니다? 대련해 주시는 겁니다? 으하핫! 이거 횡재했군요. 주군의 혼삿날에 맞는 경사입니다. 으하하하!”
예로부터 미친놈은 상대하지 말라는 말마따나, 제 팔다리를 분질러 준다는데도 좋다고 웃어대는 놈을 상대할 기운이 빠져 버린 키안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째서 제 주변엔 제정신이 박힌 놈이 한 놈도 없는가에 대해 고뇌하며.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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