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자들의 필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의 메시지를 변경할 수 있는 여지가 바울에게 허용되어야 한다. 스피크는 해리슨이 『목회서신의 문제』(1921)에서 이 편지들의 하팍스 레고메나(hapax legomena)가 오직 2세기 저술가들에게서만 입증되고 1세기의 병행구절은 없다는 인상을 주는 것에 대해 비난한다. 이와 정반대로, 이 단어들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사실은 필로(기원전 40경에 죽음)에서 뿐만 아니라 칠십인역에서도 발견된다.8 바울은 필로의 저작을 읽었을 수도 있다. 또 스피크는 비서가, 아마도 누가가, 이 편지들의 소위 비바울적인 어휘와 문체의 일부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1969:1.199). --- p.39
브록스는 목회서신에 나오는 전통을 사도행전의 구절들에서, 특히 사도행전 20:18-35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고별 연설에서 마주치는 세부사항으로 추적해 올라가는 많은 학자들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사도행전 20:20에서 교사로 제시되는데, 이것은 목회서신에 나오는 바울이라는 인물의 중요한 측면이다(딤전 2:7; 딤후 1:11; 4:7을 보라). 사도행전 20:28에 나오는, 막중한 목회 임무를 부과하는 그의 절박한 권면은 디모데전서 6:20과 디모데후서 1:13-14; 2:2에서 반향된다. 이것은 공동 저자가 저술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 접근할 수 있는 바울 학파 같은 어떤 것의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 p.52
목회서신은 여론에 대한 상당한 염려를 보여준다. 도덕적인 실패와 사회적인 탈선의 폭발을 더 효과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교회 조직”이 강화된다. 가족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룹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상의 가능한 안전”을 제공해주었지만, 이 결속이 열광에 의해서 깨어질 위험도 항상 있었다. 만약 “정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한 짓이나 가족의 위계질서에 대한 위반”이 생기면, 당국의 분노를 살 잠재성이 있었다(1960a:76). --- p.81
맥도날드는 특히 대부분 베버(Weber)에서 유래하고 벵트 홀름버그(Bengt Holmberg)가 바울 공동체의 질서에 대한 연구서인 『바울과 권력』(Paul and Power, 1980)에서 사용한 사회학적 모델에 빚을 지고 있다. 홀름버그는 제도화가 바울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바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수신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다양한 지역 직분자를 지지하고 그들의 독립성을 중시한다. 또 그의 독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권면하면서, 그는 그들이 식별하고 판단하는 지식과 능력을 강화한다. 그 편지들은 사도 권위를 사용하는 것인 동시에 그 권위를 “확산”시키는 것이다(1980:186). --- p.97
피오레는 목회서신의 권면적인 성격의 문학적 선례를 헬레니즘 세계의 문학적 도덕 권면이라는 오래된 전통에서 찾는다. 이 전통은 또 다시 더 이전의 구전 담화와 수사학적 솜씨에 의존한다. 비록 그것들은 외관상 연설이더라도, 이소크라테스의 것으로 간주되는 논문들(즉 “To Demonicus”와 “To Nicocles”)뿐만 아니라 플루타르크와 디오 크리소스톰의 왕권에 대한 논문들도 목회서신의 유형과 상황에 훌륭한 병행자료를 제공해준다(1986:78; 참조. Spicq 1969:1.38-39). --- p.117
나는 목회서신에서 수사학적 도식의 증거를 찾는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논증적이고 설득적인 의도와 관련하여, 이 편지들을 수사학적 전통과 결부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문화 가치를 공적으로 표현하고 확인하는 뛰어난 매개체인 연설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편지 쓰기를 포함하여) 어떤 세련된 담화도 그것의 영향에서 동떨어져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은 “수사학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부인에도 불구하고(고후 11:6),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2-33에서 그것을 패러디할 정도로 수사학적 관습에 충분히 익숙했다.
---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