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혜숙 ruru100@yes24.com
무릎 위에 펼쳐진 두루마기를 읽고 있는 젊은 날의 아리스토텔레스, 틀안경을 잡고 책장을 넘기는 고대 로마의 최대시인 베르길리우스, 활짝 핀 서양협죽도에 파묻혀 시를 낭송하는 17세기 인도의 시인, 앞을 못 보는 보르헤스가 책 읽어주는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
『독서의 역사』는 먼저 책 읽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대를 초월하여 책읽기에 몰두하는 그들의 눈빛과 몸짓은 진지하다. 그리고 대단한 독서광인 망구엘은 독서를 통해 얻는 그들의 기쁨과 책임감을 함께 느낀다. 이 모든 풍경이 바로 '독서의 역사'인 것이다. 각 장마다 몇 명의 작가와 수십 권 사이를 넘나드는 『독서의 역사』는 책장 가득히 꽂힌 책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그윽해지는 사람, 책 냄새를 맡으며 하루 종일 꼼짝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들을 위한 책이다.
소년 시절부터 유별나게 책을 좋아했던 망구엘은 마음껏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게 되고, 그곳에서 20세기 정신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를 만난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말년에 눈이 안 보이게 된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게 된 소년 망구엘은 그의 독특한 촌평에 문학적 영감을 받게 되고, 그 후 더더욱 책의 매혹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늘날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이기도 한 망구엘은 그의 풍부한 독서량을 자랑이라도 하듯 방대한 자료와 폭넓은 독서경험을 토대로 재미있는 일화와 갖가지 문제들을 술술 풀어낸다. 그는 자신의 독서 편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수십 세기 인류 역사를 거쳐오면서 책읽기를 사랑했고, 이를 삶의 도구로 활용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점점 범위를 넓혀 나간다. 다소 체계 없는 진행이긴 하지만 독서를 통해 얻은 경험과 다양한 독서의 행위, 독서의 방법 등, 그야말로 '독서문화에 대한 변천사'를 읽노라면 현학적이다 못해 관능적이다. 독서광들의 열정에 감탄하고, 심지어 그들의 편집광적인 집착에 기가 질릴 정도이다.
책읽기를 너무 좋아해 길거리에 나뒹구는 종이조각까지 읽었던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 책과 헤어지기 싫어 여행을 할 때면 400마리의 낙타를 동원해 11만 7000여권의 책을 끌고 다녔던 페르시아의 총리 압둘 이스마엘. 걷지 않을 때면 늘 책을 읽었다는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 역시 대단한 독서광이었던 사르트르도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관념의 느낌에 대해 고백을 한다.
책을 읽고 나면 그 책과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어 책을 훔치는 것조차 용인되는 그들에게 책을 읽는 행위는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또한 인생의 비밀을 푸는 행위이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한 방법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언제나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독서가가 갖는 특성이 현명하고 유익하게 인식되긴 하지만, 세상의 소란함에 무관심한 듯 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그들의 이미지는 다소 은밀하고 배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독서행위를 역동적인 삶과 반대되는 일로 파악한 망구엘의 어머니 역시 그를 의자와 책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열린 공간으로 내보내기 위해 애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망구엘은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말을 빌어 당당한 변명을 한다.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또한 사소한 말 한 마디, 문장 하나에도 현학적인 표현을 즐겨 쓰는 독서광들의 독서방식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스케치한다. 시인 프란체스코가 가졌던 의문처럼, 책이 손을 떠나는 순간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독자라면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읽는 방식에 대해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 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보라고.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런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고통을 치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에게 유익할 것 같은 어떤 문장이든 접하게 되면 분명히 표시해 두게. 그렇게 하면 그 표시는 자네의 기억력에서 석회의 역할을 맡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달아나고 말 걸세."
이렇듯 머리 속 기억의 궁전을 떠돌며 인용구나 이름을 끌어냈던 고대의 학자처럼 문장을 통째로 외워 낼 자신이 없다면, 책을 읽다 머리에 남는 해설이나 메모를 워드 프로세서에 보관하는 망구엘의 방법을 써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가장 정확히 기억된' 모니터 뒤의 텍스트 사이에서 적절한 어휘와 중요한 문구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독서방식은 불안정한 전압, 키 착오, 시스템 결함, 바이러스, 훼손된 디스크 등의 위험을 안고 있긴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독서의 역사를 이어나갈 우리 시대의 지적 수요자라면 나름대로 유용한 독서방법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