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은 1612년에 이미 이런 말을 했다. “부를 경멸하듯이 행동하는 사람은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부에 도달할 자신이 없는 사람만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부를 취하게 되면 가장 꼴 보기 싫은 부자가 되기 십상이다.”---p.23
1990년 독일 축구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것도 그 무렵뿐만이 아니라 몇십 년 전부터 그렇게 행복했다고 한다. 월드컵 우승이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p.31
이 책의 목적은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는 즐거움을 찾고, 그것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다.---p.39
프로이트의 강점은 그가 일시적 현상으로서 행복의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로써 프로이트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 우리를 속이려 드는 성직자, 철학자, 이데올로그 들에게 반기를 들었다.---p.50
플로(flow), 즉 ‘몰입’이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손에 쥐고, 몰아의 상태로까지 집중해서 자신이 세계와 하나되는 경험을 하는 상태이다. 여기까지는 이의가 없다. 다만 저자가 오로지 이 상태만을 행복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문제다. 저자는 섹스나 음주, 향락 같은 것은 단순한 즐거움이라 치부하고, 행복과 다른 것으로 판단한다. 영혼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행복에 대한 대중적인 관념은 앞서 신학자나 많은 철학자들의 주장(행복은 미덕의 토대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처럼 급격하게 제한된다.---p.56페이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에 대한 비평)
행복 조언자들이 가장 목소리를 높이지만 실은 별 효과가 없는 분야, 즉 사랑과 돈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충고를 포기하겠다.---p.66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를 수수께끼 같은 충고도 우글거린다.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어라”, “삶의 매순간을 성취된 것으로 바라볼 준비를 하라”, “삶에 내재한 축제의 원칙을 시험하라!” 그래, 그러고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들을 수가 없다.---p.115페이지 (베스트셀러 『단순하게 살아라』에 대한 비평)
귄터 그라스는 2006년 『슈피겔』 지와의 인터뷰에서 68운동이 “개인적인 것과 자아실현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을 비판했다. 그들이 사회를 “좀더 투명하게 만들고 인습과 관습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분적으로 사회를 좀더 무책임한 풍조로” 이끌었다는 것이다.---p.122
“인격이 자유롭게 발전해 나간다는 이념은 인격이 자유롭게 발전한 개인과 마주치지 않는 한 아주 훌륭한 말처럼 들린다.”---p.123
간략하게 말해서 『월든』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리히텐베르크의 아름다운 말이 떠오른다. “나는 시인들이 촌부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뒤틀린다. 내가 항상 말하듯, 너는 촌부처럼 행복해지고자 하면서도 여전히 허영을 떨고 있다. 그래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단순한 삶을 꿈꾸는 것은 비교에 기초한, 복잡한 도시인들의 판타지일 뿐이다.---p.154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들으라, 부자들아. 너희는 앞으로 닥칠 고생으로 울고 통곡하리라”(야고보서 5장 1절). 그러나 성경에 없는 말은 무엇일까? 우디 앨런이 대신 말한다. “부는 가난보다 낫다. 경제적인 이유 하나만 보더라도.”---p.179
간단하게 말해서 기독교인과 무신론자,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들이 한결같이 신성한 노동을 들먹이며 우리를 귀찮게 하는 것은 역겹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도 그렇게 느꼈는지 1833년에 이미 풍자 반 진지함 반으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포하면서 “개인과 그 후손까지 완전히 결딴낼 정도로 심각한 노동 중독”을 비난했다.---p.221
[실직에서]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사교와 만남의 장소로서 직장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직장에서 연인을 만나는 경우가 잦고, 친구도 직장에서 사귀는 경우가 많다. 그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축구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접촉은 구내식당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p.236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를 인간에 대한 도덕적 명령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자연은 생명의 경외를 전혀 모르고 “잔인한 이기주의”만 가르칠 뿐이라는 사실, 즉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신은 우리가 도덕적인 것으로서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p.277
그렇다면 국가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처럼 국민의 행복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일까? 하지만 이것을 국가의 강령으로 채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소망이 “모든 정치적 이상 중에서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카를 포퍼가 1945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밝힌 내용이다.---p.292
전쟁은 대개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을 야기한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정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1일이 그렇다. 만일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실현한 역사적 시점을 꼽자면 이날은 절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유럽 각국의 수백만 인파가 행복감에 도취되어 전쟁에 열광했고, 종파를 떠나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감격에 젖어 전쟁의 도덕적 정당성이 자기편에 있다고 설파했다.---p.308
스포츠용품 대기업 나이키의 선전문구에 이런 것이 있다. “재미있으면 하라!” “맙소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차라리 재미있어 보이는 것의 절반은 평생 하지 않는 것이 좋다.---p.310
플라톤이든 푸리에든 자먀틴이든 죽 훑어보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다. 고전적인 유토피아들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국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불행으로 가는 길만 보여주었다. 게다가 현실에서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할 때는 지상의 불행만 증가했다.---p.315
이렇게 말하기는 괴롭지만, 행복이 지상의 최고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행복이 인생의 최고 목표일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불행이 야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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