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약속이다. 그것은 ‘경건한 신자들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며, 교회사(敎會史) 전반에 걸쳐 ‘하나님을 향한 아낌없는 마음의 행위’로 인정되었다. 서원은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의 대의(大義)를 향한 자발적이면서도 약속된 사랑의 행위이다. 그것은 마치 부부가 자신들의 관계를 더 특별하게 하기 위해 배우자가 예상하지 못한 넘치는 사랑과 친절의 몸짓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다. _14p
서원함으로써 우리는 뜨거운 순종의 지대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순종은 인간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 그리스도 은혜의 열매이다. 모든 서원이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서원’인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다. _39p
서원은 은혜의 능력 안에 견고하게 머물기 위한 약속이지, 현재의 우리가 아닌 다른 어떤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몰아가기 위한 약속이 결코 아니다. _55p
기억하라. 서원은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한 시도가 결코 아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서원의 목적이나 이유로 삼지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만을 서원의 유일한 목적과 이유로 삼을 때, 오직 이럴 때만이 우리의 서원이 합당할 수 있다. _94p
완벽해지는 것은 서원의 참된 목적이 아니다. 언제나 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서원은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서원은 시작할 자유, 중간에서 실패할 자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의 약속에 견고히 달라붙어 머물러 있을 자유를 허락한다. _137p
[ 저자의 프롤로그 ]
잃어버린 보석을 찾아라!
나는 늘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길 원했고, 하나님나라에 더 깊이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선물을 하나님을 위해 최대한 깊고 넓게 사용하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접어든 서원(誓願)의 길이 이런 나의 갈망에 풍성한 연료를 공급해주고 있다.
처음 서원의 여정을 시작했을 때, 나는 거대한 유조선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질문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질문이 많다. 물론 그 질문들이,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의 질문과는 많이 다르고 영적으로 나아지긴 했지만…. 그러나 의문이 있다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여정에 보람 있고 흥미로운 대화를 위한 소재들이 풍부하다고 확실히 믿는다.
숲의 오솔길을 따라 산책한 적이 있는가? 원래의 오솔길에서 갈라져 나와 깊은 숲 속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어렴풋한 샛길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길을 좋아한다. 그런 길을 볼 때마다 탐사하고 싶은 유혹에 쉽사리 굴복하고 만다. 때로는 그런 길에서 뜻밖의 모험을 만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꼬불꼬불 돌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서원한다’는 것은 인적이 드문 샛길을 걷는 것과 같다. 나는 십대(十代)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 거의 40년 넘게 하나님의 오솔길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6년 전 어느 날, 사도행전을 읽다가 ‘서원’이라는 이 작은 길을 우연히 발견했다.
서원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몹시도 낯선 행위이지만, 성경시대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한 관습이었다. 서원은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해주는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하겠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이다. 따라서 서원은 강건한 영적 삶을 촉진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이를테면 영(靈)의 근육을 견고하고 강인하게 단련시키는 일종의 ‘근육 강화제’이다.
나는 서원의 길을 어슬렁거리는 동안, 그 길에서 호기심을 느꼈고 믿음의 역량을 기르게도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길은 매우 위험했다(이것이 서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계획을 세워서 의도적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모든 행위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앞에 놓기보다 인간의 행위를 앞에 놓는 율법주의가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서원의 길이 우리를 바람직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을 쓰는 까닭도 그런 확신 때문이다.
나는 《종교적으로 전염된 질병》이라는 책에서 왜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순결한 믿음을 변색시키는 나쁜 종교인지에 대해 논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종교는 인간이 중심인 종교와 정반대로 순수하고 순결하며 강력하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종교와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결국은 병(病)에 걸린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슬프게도 그 병은 너무 쉽게 전염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서원하는 것’은 종교에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약 1:27) 종교에 관계된 것이다. ‘religion’(종교)이라는 단어는 ‘단단히 묶다’, ‘…에 매다’라는 뜻의 라틴어 ‘religare’에서 유래했다. 좋은 종교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롭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단단히 묶는 일만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네!”라고 크게 소리치며 그 사랑에 반응하기로 결단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2005년 5월, 독일에서 고전음악 학자 한 사람이 바흐의 미공개 악보를 발견해서 바흐를 사랑하는 고전음악 애호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 악보는 1713년 10월로 날짜가 기록된 두 장짜리 자필 아리아 악보였다.
그런데 당시 28세의 바흐가 작곡한 그 작품이 연주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 작품은 바흐가 궁정 오르간 연주자 시절에 모시던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의 생일 카드 상자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져 있었다. 바흐의 열성 팬들은 그 곡이 없더라도 충분히 바흐를 사랑하고 그의 음악을 즐길 수 있었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작품은 ‘제자리에 놓이지 못한 보석’이었다.
나는 서원이 제자리에 놓이지 못한 보석이라 생각한다.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실로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고 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져 있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녀들은 그 보석이 없어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으며, 여전히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보석을 발견하면 우리 모두의 심령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리라 확신한다.
나는 서원의 길을 발견하기 전에도 영적으로 곤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을 발견했을 때, 전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졌다. 당신도 그럴 것이라 확신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