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_ 변한 것은 없는데 하나도 같지 않다
〔미움〕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뿌리 없는 허상 (p.13)
어떤 여인이 찾아와 이웃의 누군가가 미워죽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여인에게 언제 적 이웃이 미운지 물어보았습니다.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무슨 말인지 궁금해 했습니다.
“사람은 늘 바뀌기 마련인데, 당신이 미워하는 그 이웃은 언제 적 사람입니까? 어제의 사람이라면 밤새 달라졌을 수 있으니 이제는 그만 미워하시고, 오늘 아침의 사람이라면 그 사이 또 바뀌었을 수 있으니 그만 미워하시고, 방금 전의 사람이라면 앞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 그만 미워하십시오.”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바뀝니다. 어제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든지 바뀌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사실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미워하는 감정은 어느 고정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생겨난 것인데 반해, 사람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늘 바뀌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계속해서 바뀝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뿌리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안 五眼〕세상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 눈 (p.19)
도적의 눈에는 온통 도적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온통 부처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중략)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진리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진관법眞觀法이라 합니다.
둘째, 깨끗한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청정관법 청정淸淨觀法이라 합니다.
셋째, 지혜로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지혜관법智慧觀法이라 합니다.
넷째, 눈으로 본 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지의 바라봄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비관법非觀法이라 합니다.
다섯째,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자관법慈觀法이라 합니다.
이 다섯 가지 눈을 가지게 되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화롭고 살 만한 곳이 됩니다. 더 이상 미움도 다툼도 시기도 질투도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2장_ 방석 한 장 위에 스스로 몸을 묶고 마음을 묶다
〔결제 結制〕방석 한 장 위에 스스로 몸을 묶고 마음을 묶다 (p.76)
출가자들은 음력 4월 15일부터 석 달 동안 여름 안거安居를 하고, 음력 10월 15일부터 석 달 동안 겨울 안거를 합니다. 안거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結制라고 하는데,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참선 수행을 합니다.
안거 제도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출가자들은 한곳에 머무는 일 없이 탁발걸식 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인도에서는 우기雨期가 되면 땅속의 온갖 작은 동식물들이 기어 나왔기 때문에 자칫 밟아 죽일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동안에는 우안거雨安居라 하여 한곳에 머물며 수행토록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여름 안거와 겨울 안거가 된 것입니다.
안거는 출가자들의 자기수행의 시간이지만, 나는 재가자在家者들도 여름 안거와 겨울 안거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출가자들처럼 온종일 참선을 할 수는 없겠지만, 결제 기간 동안 하루에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여유가 없으면 다만 30분이라도 참선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시에 사는 재가자들을 위해 선원에서 두 차례의 결제 기간을 갖습니다. 결제 기간에는 날마다 오후 2시에서 5시까지 집중적으로 참선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가자의 몸으로 결제를 지키기 위해 이 참선에 함께합니다. 그리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물론 꼭 선원에 나와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참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결제 기간 동안만이라도 특별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자기 수행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결제는 자기 스스로를 묶는 것입니다. 몸을 묶고 마음을 묶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출가자들은 결제 기간 동안 방석 한 장 공간 위에 스스로를 묶습니다.
재가자들은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결제 기간 동안 수행에 더욱 매진하고 더 절제된 생활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 향상시켜야 할 것입니다.
〔탐주정랑 探珠靜浪〕구슬을 찾으려면 물이 고요해야 한다 (p.91)
구슬을 찾으려면 마땅히 물이 고요해야 할 것이니 물이 움직이면 구슬을 찾기 어렵습니다. 구정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웅덩이의 물을 맑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을 맑게 하겠다고 휘저으면 물은 점점 더 탁하게 될 것이고, 물속에 있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물을 맑게 하려면 가만히 두어야 합니다. 가만히 두면 물결이 고요해지면서 온갖 티끌이 가라앉아 맑고 깨끗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웅덩이 속에 빠뜨린 구슬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가만히 둔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니 곧 멈추는 경지를 말합니다. 누가 칭찬을 해도 동요가 없고, 욕을 해도 동요가 없는 ‘지止’의 경지입니다.
여기서 물결은 사람의 탐욕과 번뇌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슬은 내 안에 들어 있는 지혜를 뜻합니다. 탐욕과 번뇌가 많으면 점점 어리석게 되어 지혜는 더욱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탐욕과 번뇌가 사라진 뒤에야 지혜가 그 모습을 보이듯, 모든 움직임이 사라져 물이 맑아져야 물 밑까지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내 안에 들어 있는 지혜의 구슬을 찾기 위해서는 멈추어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갖 티끌이 가라앉게 해야 합니다. 티끌이 완전히 가라앉은 다음에는, 가라앉은 티끌을 걷어내어 흔들어도 다시는 물이 더러워지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멈춘다는 ‘지止 수행’이 완성된 것입니다.
3장_ 마음공부, 가시가 꽃이 되다
【탐진치 貪瞋癡】 반드시 버려야 할 세 가지 독毒 (p.121)
탐욕貪慾과 진에瞋?, 우치愚癡는 반드시 버려야 할 세 가지 독毒입니다. 이를 흔히 탐진치貪瞋癡라고 합니다.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번뇌는 깨달음의 삶을 살아가는 데 큰 걸림돌입니다.
탐욕은 날카로운 가시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움켜쥐면 쥘수록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놓지 못하고 더 움켜쥐려고 합니다. 탐욕을 두고 본능적인 독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놓는 순간, 고통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가시는 꽃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으로 바뀝니다. (중략)
【공 空】 모양 있는 모든 것은 모양 없는 것이 뒷받침한다 (p.125)
아름다운 그릇이 하나 있습니다. 그릇이 그릇으로 쓸모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화려한 문양 때문일까요? 유명한 장인이 빚어낸 높은 예술성 때문일까요? 사실 그릇이 그릇으로서 쓸모가 있는 것은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는 그곳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멋진 집이 한 채 있습니다. 집이 집으로서 쓸모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멋진 모습 때문일까요? 값비싼 장식 때문일까요? 집이 집으로서 쓸모가 있는 것은 집 안에 있는 빈 방들 때문입니다. 방이 비어 있어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기 때문에 집으로서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무릇 모든 물건의 쓰임새는 물건 그 자체보다는 그 물건이 만들어 낸 빈 공간에 있습니다. 모양 있는 모든 것은 모양 없는 것이 뒷받침을 하고 있어 그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뒷받침하는 것은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빈 공간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비우는 훈련을 힘주어 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채우려는 욕심만 부릴 줄 알지 비울 줄을 모릅니다. 비워야 담을 수 있습니다. 크게 담기 위해서는 크게 비워야 합니다. 비워야 빈 그곳에 채울 수 있습니다. 재물을 채우고, 사람을 채우고, 지혜를 채울 수 있습니다.
【신앙 信仰】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는 수행의 과정 (p.146)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오늘날 세계의 많은 종교들이 신앙의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끼리 서로 날카롭게 맞서고, 헐뜯고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는 신앙 이전에 자기수행自己修行이 더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참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행 없이 신앙만 가지려고 하면 엉터리가 되기 쉽습니다. 그 엉터리 신앙은 다른 신앙인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종교끼리 갈등하고 맞서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신앙 이전에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는 수행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가시가 아닌 꽃이 됩니다.
4장_ 흔적 없이 베풀고, 아낌없이 나누다
【유호덕 攸好德】덕을 좋아하고 즐겨 덕을 베풀다 (p.158)
옛 사람들은 오복五福이라 하여 다섯 가지 복을 이야기했습니다.
수壽가 첫 번째이니 누구든지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부富가 그 다음이니, 오래 살아봤자 가난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강녕康寧이니, 오래 살고 돈이 많아도 병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욕심을 낸 복입니다.
그 다음이 유호덕攸好德입니다. 옛사람들은 덕을 좋아하고 남에게 즐겨 덕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호덕입니다.
그 다음이 고종명考終命입니다. 고종명은 하늘이 내려준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을 말합니다. 한동안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무척 유행했는데, 요즘에는 웰다잉Well-Dying이란 말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이처럼 고종명이란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깨끗한 정신으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오복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유호덕’입니다. 오래 살고, 부자가 되고, 병 없이 살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라는 복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유호덕을 잘 모릅니다. 덕을 좋아하고 덕을 베풀 줄 모릅니다. 그저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고, 자식들 잘되고, 제 몸 건강하면 그만인 줄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옛사람들이 훨씬 더 여유 있고 풍요롭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 서양 사람들도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 Noblesse oblige’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경제적. 사회적 가치들을 사회에 되돌린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회에 덕을 베푼다는 유호덕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가 봅니다. 서양 사람들이나 동양 사람들 모두 유호덕을 이야기했으니 말입니다. 삶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유호덕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