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 독자에게 바치는 오마주
후안 까를로스 오네띠는 1993년 죽음을 앞두고 문학적 유서처럼 써내려간 마지막 소설 『이제는 상관없다』(Cuando ya no importe)를 발표할 때까지 오직 문학의 외길만을 걸었던 진정한 작가다. 그는 거의 바깥출입 없이 허구세계에 몰입한 채 마드리드의 아파트 침대 위에서 마지막 12년을 보냈다. 이 기간에 그가 한 일이라곤 읽고 쓰는 것이 전부였으며, 최후의 순간에도 손에 한권의 책을 든 채 숨을 거두었다. 읽고 쓰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네띠는 결코 글쓰기의 노예가 아니었다. 문학을 “연인 같은 존재”로 여겼던 이 “게으른” 천재에게 글쓰기는 행복이었고 존재이유였고, “그 쾌락은 쎅스와 같이 강렬한 것”이었다.
오네띠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80년에는 스페인어권 최고 권위의 세르반떼스상을 수상해 그 문학성을 널리 인정받은 바 있다. 심지어 그가 몬떼비데오가 아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슈퍼스타는 보르헤스가 아닌 오네띠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찍이 지방색이 강한 지역주의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도시문학의 문을 열었던 그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근대성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였으며,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소통 단절과 인간적 고뇌를 그린 첫 소설 『우물』은 진정 현대적인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소설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970년대 이전까지 오네띠는 부당하게도 오랫동안 잊힌 작가였다. 동시대의 문학흐름과 동떨어진, 작가의 극히 염세적인 세계관도 그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오네띠는 가상의 공간인 싼따 마리아(Santa Maria)를 배경으로 하거나 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련의 소설을 가리키는 ‘싼따 마리아 싸가(saga)’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싼따 마리아는 『조선소』(El astillero, 1961), 『훈따까다베레스』(Juntacadaveres, 1964)를 거쳐 『바람이 말하리라』(Dejemos hablar al viento, 1979)에서 큰 화재로 파괴될 때까지 오네띠의 많은 작품에서 중심무대가 된다. 작가는 싼따 마리아가 그가 태어난 도시 몬떼비데오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산물이라고 말하지만,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마꼰도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던 윌리엄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짧은 생애』(La vida breve, 1950)는 싼따 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첫 작품이자 장차 다른 소설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될 여러 인물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또한 욕망과 기만, 환멸이라는 오네띠 문학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그의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작가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작품으로 알려진 『아디오스』는 폐결핵환자인 전직 농구선수와 그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마을에 단 하나뿐인 가게 주인의 시점에서 서술한다. 여기에서 오네띠의 서술기법은 씰비아 몰로이가 말하는 ‘가십 픽션’(fiction of gossip)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개인(가게 주인―내레이터)이 다른 사람(독자)에게 제3자(전직 농구선수)에 관한 가십을 전한다. 가십은 언제나 권력게임이거나 혹은 자신의 지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부과하려는 욕망이다. 가게 주인의 서술은 매혹적인 구술 이야기의 기법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흡인력 있는 가십거리가 된다. 이는 독자의 공모를 유도하며, 우리는 가십의 전달자인 내레이터의 서술시점에 갇히게 된다. 처음부터 내레이터는 단 한번도 빗나간 적이 없는 예언능력의 소유자로 나타나며 ‘불가피한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개는 내레이터의 예언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이 전직 농구선수에게 전해주지 않고 보관해둔 편지를 통해 여자들의 정체를 확인하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레이터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그의 공모자인 독자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디오스』에 접근하는 가장 초보적인 하나의 독서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서방식과 작별해야 한다. 『아디오스』는 독자에게 많은 질문과 선택을 허락하고 독자의 상상력을 예리하게 자극하는 열린 소설이기 때문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내레이터인 가게 주인은 처음부터 신뢰할 수 없는 존재다. 간호사나 웨이트리스 같은 정보제공자들의 말은 언제나 내레이터의 일정한 여과과정을 거쳐 전달되므로 그 이야기는 주관적이고 부분적이며,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한다. 기껏해야 이야기의 한 버전에 불과하며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다른 이야기(들)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인접한 의미단위들을 연결하는 독서로부터 일어난 것 대신 일어났을 수 있는 의미단위들에 대해 추정하는 독서로 이행할 때, 『아디오스』 읽기는 일종의 ‘의심의 해석학’(Verdachtshermeneutik), 즉 애매성(ambiguity)과 의심이 요구하는 해석들의 유희로 탈바꿈한다.
이야기의 애매성 때문에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곧잘 비교되는 이 작품은 독자를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진실들에 대한 탐색으로 끌어들인다. 볼프강 루칭은 「에필로그」에서 이 소설의 수수께끼들에 대한 하나의 ‘해결’을 제안하고 있다. 작품 속의 소녀가 전직 농구선수의 딸이자 연인일 수 있다는 그의 분석은 내레이터의 예언능력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다. 실제로 내레이터는 자신의 시야에 잡히는 것 이상의 복잡한 가능성을 예견할 수 없다. 목격자도 없고 자살 메모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직 농구선수의 죽음도 일종의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이처럼 독자의 관점에 따라 전직 농구선수의 근친상간과 피살, 더 나아가 그와 내레이터 간의 잠재적인 동성애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해석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또 텍스트 안에는 이러한 가설들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실마리가 숨겨져 있다. 결국 그 어떤 것도 확실치 않으며 작가는 생략의 원리에 따라 의도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씨퀀스, 즉 독자의 상상력을 위한 틈새를 남겨둔다. 현대의 소설가들 중에서 오네띠만큼 독자의 해석전략에 크게 기대는 작가는 거의 없다. 오네띠는 「작가의 말」에서 루칭의 ‘해결’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걸 제공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대로, 나사의 나머지 반회전은 텍스트의 진정한 주인공인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독자는 매번 작가가 치밀하게 설치한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정적 해결을 허락하지 않는 텍스트에서 결정적 해석을 얻고자 하는 승산 없는 게임에 걸려들기 때문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