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부터 45년은 독일 국민에게 절망의 시기였습니다. 패전과 연합국의 점령은 독일 국민에게서 일체의 소망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빵 한 쪽을 구할 수 없고, 물 한 모금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틸리케는 ‘사람의 관점’으로 이런 동포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동포가 저지른 죄악을 고발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주시는 참된 위로와 소망을 전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시대를 가리켜 미래도 안 보이고 소망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알 수 없는 내일에 인생을 바치는 대신 차라리 오늘을 즐기라는 게 이 시대의 모토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이런 현실 역시 주기도문이 가르쳐 주시는 진리를 망각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시대에 이웃은 사라지고 나만이 남았습니다. 오로지 나만 잘살고 보자는 이기심이 주기도문도 하나의 주문呪文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실 자녀 교육, 주택 문제, 분배의 불평등, 부의 양극화, 계급화가 엄존하는 현실의 뒷면을 들춰 보면, ‘나’와 ‘너’의 구별만 있을 뿐 ‘우리’는 사라져 버린 서글픈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셀 수도 없이 많은 설교가 강단에서 울려 퍼지고 있지만, 십자가의 길을 외치는 이가 얼마나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간곡하게 일깨우는 설교가 얼마나 됩니까? 과연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틸리케가 설파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지극히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가난한 자, 굶주리는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을 섬기고 있을까요?
이 시대는 가벼움이 넘쳐 납니다. 설교도 그러하고 신앙도 그러합니다. 때문에 깊은 성찰이 필요한 글이나 설교에는 등을 돌리는 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늘 신앙의 실질Sache을 깊이 생각하게 마련”이라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발터 퀴네트의 말처럼,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헬무트 틸리케의 이 엄중한 설교를 꼭 읽고 그 가르침을 깊이 숙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는 전쟁도, 굶주림도, 포탄에 죽어 나가는 인생도 없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느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모든 이가 한 형제임을,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만이 교회와 성도가 갈 길임을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8년은 헬무트 틸리케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래전 저 독일에서 울려 퍼졌던 이 선지자의 음성이 오늘 한국에서 새로운 감격과 깨우침과 회개로 메아리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우리가 연약하거나 지치거나 미련하고 둔감한 채로 기도할 때, 예수께서는 그분의 손으로 우리의 연악하고 지쳐 버린 기도의 말을 세워 주십니다. 예수의 이 손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입 속에서 연약하고 지쳐 버린 우리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됩니다. 의심이라는 강력한 세력이 에워싸거나 영혼을 엄습하는 커다란 고독이 우리 입술에 올릴 말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벙어리가 되어 버리지만, 그때에도 예수께서는 신실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변호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죽어 가는 자의 탄식마저 이해하십니다. 그분은 그 탄식에 아름다운 장신구와 예복을 입혀 주시는 분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탄신을 지극히 귀한 기도의 반열에 올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져다주셨던 바로 그 분이 우리와 더불어 기도하고 계십니다.---pp.58-59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짧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주기도는 우리에게 널리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지만, 특별히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다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주님은 우리가 미리 저만큼 앞서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내일은 내일 염려와 더불어 이미 아버지의 손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내일 일이 바로 이 아버지의 손에서 유래한다는 확신을 우리 자신에게 심어 주는 것뿐입니다.---pp.153-154
그분의 말씀이 곧 영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을 통째로 알려 주지 않습니다. 또한 삶의 여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통째로 위로해 주지도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발의 등불이요 우리 길의 빛”입니다. 말씀이라는 그 빛은 우리가 지금 걸어가야 할 한 걸음 한 걸음만을 비춰 줍니다. ……우리는 어둠속을 걸어가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분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현재와 우리의 오늘만을 맡기면 됩니다. 미래와 세상 마지막 날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pp.154-155
나는 기도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의 교회가 달콤한 삶이나 꿈꾸는 곳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교회가 저 잃어버린 자들에게 깊숙이 몸을 굽혀 그들을 보호해 주는 어머니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교회가 권력을 쥔 자들의 영광을 흘낏흘낏 훔쳐보며 그 영광을 좇아가는 추종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교회가 증오와 복수가 판치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진정 사랑받는 위로의 기념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세상을 구원하고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교회는 심판을 설교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 국민에게 커다란 재앙이 임할 것을 전하면서 무서운 시대의 징조를 밝히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p.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