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 아니 ‘새하얀 눈 아이’는 …이렇게 시작 한다
한겨울이었지. 하늘에서 하늘하늘 깃털처럼 눈이 내리고 있던 날이었어. 검은 흑단 나무로 된 창가에 앉아, 여왕이 바느질하고 있었지. 바느질을 하다가, 그녀는 눈을 쳐다보았어. 그러다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고 말았지. 피 세 방울이 눈 위로 떨어졌어. 새하얀 눈 속에 있는 그 붉은 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던지,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창틀의 나무처럼 검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을 그분은 품었지. 얼마 안 있어 그분은 딸아이를 보게 되었는데,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흑단 나무처럼 거무스름한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어. 그래서 ‘새하얀 눈 아이’라 불렀지. 그런데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오게 된 날, 여왕은 생기가 다 빠져 말라죽었단다. --- p.26
우리가 아는 백설 공주는 어떻게 잘못 되었나
아무데나 가위질을 해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번역본이 가지는 또 다른 잘못은, 낱말을 막 바꿀 뿐만 아니라 없는 말도 막 집어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뒤져 본 모든 책이 이 허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걸리는 게 아주 많지만,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원문에 ‘그 못돼 먹은 계집(여자)’으로 되어 있는 것을 ‘왕비’로 옮긴 것, ‘눈처럼 새하얀’, ‘피처럼 붉은’이라 되어 있는데 굳이 ‘살결’과 ‘입술’을 덧대 ‘눈처럼 하얀 살결’, ‘피처럼 붉은 입술’로 옮긴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옮기면 안 되는 까닭 역시 제가 뒤에 또렷하게 밝혀 놓았기에, ………그런데 이 허물은, 문학을 허물어뜨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각하고 되잡아 보는 힘이 크는 것을 짓누르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어느 때는 왕비(여왕)라 했다가 어느 때는 못돼 먹은 여자라 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가?’란 물음조차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 pp.8-9
우리나라 번역본을 보면, 옛이야기임에도 거기에 나오는 말들이 너무 현란하고 감정 과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Grimm 형제가 모은 독일 옛이야기 대부분은 건조하고 담담하다는 사실입니다. --- p.10
[발도르프 사범대학, 독일 옛이야기] 과목 담당 선생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지혜가 깃든 이야기의 느낌이 나게 담담하게 하라”였습니다. --- p.11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요? 아마도, 전래 동화M?rchen를 동화童話라 여긴 데에 그 까닭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못 박아 말하건대, 전래 동화M?rchen는 동화童話가 아닙니다. --- p.12
우리 말 ‘동화’로 옮긴 독일어 낱말은 메르센M?rchen인데, 그 낱말은 단지 ‘작은 이야기’라는 뜻일 뿐, 거기에 ‘어린이’를 뜻하는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 p.14
‘공주 콤플렉스’란 말에서 보듯, 그렇게 잘려나가고 늘어난 백설 공주는 우리의 피를 맑게 하고 등뼈를 곧추세우기는 커녕, 외려 우리의 피를 끈적끈적하게 했고 우리의 등뼈를 허물어뜨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 p.15
과연 공주로 옮기는 게 올바른가를 판때리기(판정하기) 위해, 번거롭지만, 주인공 이름에 해당하는 독일어를 여기서 따져볼까 합니다. --- p.101
이름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 왜 그 애를 ‘새하얀 눈 아이’라고 불렀을까? --- p.103
‘뜻이 뭉쳐 생겨난 자식’ 하니까 색다른 맛이 느껴지죠? 이런 게 다 헤아림이 주는 맛이고 깊이입니다. 그러면 여왕이 무슨 뜻을 품었죠?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나무로 된 창틀처럼 검은 애를 가질 수 있다면”이란 뜻을 품었어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이 글귀만을 놓고 보았을 때, 따져보고 싶은 게 없나요? ‘검은 애를 바라는 엄마라니!’라고 묻고 보면, 그냥 넘어가기엔 께름칙하죠? --- pp.105-106
산이건 평지이건 상관없이, 나무들이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곳을 그들은 발트Walt라고 해요. 이 단어를 그냥 ‘숲’이라고 옮기기엔 맞지 않는 것 같아, ‘엄청난’을 덧붙여서 옮겼어요. 우리말 ‘숲’은 크다는 생각을 별로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낭만적인 느낌을 자아내잖아요? 그런데 독일의 발트Walt는 우리말 산맥에 해당할 만큼 큰 규모이거나, 우리나라 한 도시만한 넓이에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곳을 말하거든요. --- p.135
사실, 좀 더 밝은 눈으로 본다면, 새 삶 새 시대가 열린다는 눈짓은 이 이야기 처음부터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요. 보세요! “한겨울이었지” 하고 있어요. --- p.145
이렇게 세상에 나온 아이는 이제, 옛 시대 옛 삶에 맞서서 기나긴 싸움을 해야 해요. 그것을 이야기꾼은, 엄청난 숲에서 뾰족뾰족한 돌을 뛰어넘고, 가시를 헤치며 나아갔고, 들짐승들이 지나가도, 걷고 또 걸은 것으로 나타낸 거지요. --- p.146
그러니 여러분도 너무 빨리 자기 길을 골라잡지 마세요. 평생을 걸어야 할 길인데,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 p.157
아침이 되어 새하얀 눈 아이가 눈을 떴을 때, 일곱 난쟁이가 그 사람 앞에 있었어요. 잠든 사이에 와 있었던 거죠. 자신을 신에게 맡긴 것에 대한 베풂인가요? 아니면 그 아이가 엄청난 숲을 헤쳐 나오면서 이루어 낸 것인가요? 다시 말해, 그 스스로 자신 속에 이루어 놓은 것을, 눈에 보이게 이야기꾼이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인가요? --- p.154
둘이면서도 하나가 된 새하얀 눈 아이와 일곱 난쟁이는, 이제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어려움을 함께 뚫고 나가야 해요. 이 차원에 계모라고도 하고, 여왕이라고도 하고, 못돼 먹은 계집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엉켜 있어요. --- p.158
어떤 사람이, ‘왕’의 본질을 제 본질로 삼고서 왕처럼 살고 있다면, 종교적인 눈으로 보면 그도 왕의 딸이고 왕의 아들이며 더 나아가 왕인 거지요. --- p.159
그 여자가 먹었던 것은 참으로는 뭐였죠? 그래요. 멧돼지 새끼의 간과 허파였어요. 그러면 그 여자 속에서 살아 구실을 한 것이 뭐가 되는 거죠? 멧돼지예요. 다시 말해 그녀는 멧돼지에게 자신을 내주고, 멧돼지의 모습과 성깔로 살았던 거지요. 그런데 멧돼지의 간과 허파를 먹은 사람은 그 여자뿐일까요? 우리도 그것을 먹은 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도 그 무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능력이 아니라, 경쟁력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우리는 누구인가요? 자기보다 앞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못돼 먹은 여자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자가 아닌가요? 아름다움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고 먹었는데, 사실 그것은 멧돼지의 간이고 허파여서,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는데도, 그런 사실조차 모르는 과똑똑이가 아닌가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우리도 태어날 땐 여왕이었지만, 멧돼지로 살다 죽을 수밖에 없어요. 몸을 키우는 먹을거리에서는 농약이 묻어 있니 어쩌니 따지면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먹을거리에는, 독이 있는지 없는지를 안 따지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 pp.164-165
그러니 여간내기가 아니면, 신발의 마술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공자가 힘주어 말한 “자기를 이기고 예로 되돌아가라.”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도, “네 신발을 벗으라.”는 말일 뿐이에요. --- p.170
쫓겨난 그 사람을 기다리는 건, 뾰족뾰족한 돌과, 앙상한 가시와, 길들지 않은 산짐승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살이예요.(172쪽)
그런데 이 사과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었어요. 이야기꾼은 그것을 뭐라 하고 있죠? “한 입이라도 베어 먹는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도대체 이 사과는 무엇이기에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같지 않으세요? (179쪽)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해요. 우리의 목숨을 조르고, 얼을 빼고, 영혼을 죽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묻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를 속속들이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p.183
귀도 있고 눈도 있지만, 손도 발도 없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 들어보았나? 하느님을 본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하데! --- p.190
“어디에, 내가 있지?” 눈뜨고서 내는 첫소리가, 눈 뜬 사람이면 누구나 물어야 할 물음 아닌가?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