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다른 누구의 마음도 진정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그런데 유독 장애인을 대할 때는 섣부르게 학습된 방식을 배려와 이해라 착각하곤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우리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치를 심는다. 그것은 주인공 미로가 그토록 원했던 ‘조화로움’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눈으로 볼 수 없을 때는 꿈꾸는 일이 쉽다. 상상력이 호박 덩이처럼 부풀어 올라 머릿속에서 펑, 하고 터진다. 나는 하루 종일 만지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꿈을 꾼다. 그것말고는 달리 몰두할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
사실 나는 과묵한 편이 아니다. 오히려 수다쟁이에 가깝다. 아마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얘기를 많이 할 것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면 말이 필요하니까. --- pp.9~10
바로 그때,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할아버지의 비명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미로! 미로! 내 팔목! 놈이 내 팔목을 물었어!”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할아버지가 떨어뜨린 칼을 주우려고 바닥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볼로, 저리 비켜!
그리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곰치의 몸에 칼을 꽂고, 꽂고, 또 꽂았다. 곰치는 거대한 몸을 움찔거리면서도 입에 문 포획물을 쉽사리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곰치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 할아버지가 다른 한 손으로 어설프나마 방향을 일러 주었다. 나는 다시 칼을 내리꽂았다.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그러고는 재빨리 놈의 목을 졸랐다. 곰치는 완강하게 버티다가 마침내 할아버지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몇 번인가 몸을 펄떡이더니 이내 꼼짝하지 않았다.
곰치가 죽었다.
볼로, 봤어? 곰치가 죽었다고. --- p.25
잠시 뒤 뤼카가 팔뤼슈 할아버지를 태운 커다란 카트를 밀고 나타났다. 이럴 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서둘러, 미로! 카트에 바짝 붙어 서서 나랑 같이 밀자.”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병원 정원 쪽으로 달렸다. 비로소 할아버지의 노란 얼굴에 신선한 공기를 쐬어 주게 되었다.
볼로, 절대로 짖으면 안 돼. 제발 부탁이야. 우린 지금 아주아주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까…….
난 순전히 뤼카만 믿고 달렸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어떤 눈먼 자도 그렇게 뛰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숨이 턱까지 찰 만큼 달리고 또 달렸다. --- p.31
륀의 목소리는 그 문장들, 그 복도들, 그 높다란 천장들을 닮았다. 아주 유연하고 매혹적인 륀의 목소리는 나를 빨아들인다. 내 짙은 어둠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고, 선명한 윤곽을 그린다.
“계속 읽을까?”
“그거 무슨 책이야?”
“파올로 파솔리니의 『인도의 향기』.”
“처음 듣는 제목이야. 근데 그거 어디서 났어?”
“우리 아빠 서재에서.”
륀은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간다. 난 더 이상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고 오직 륀의 목소리만 듣는다. 내게는 목소리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 소리가 내게 에너지를 준다. 그리고 여전히 그 목소리에 어떤 얼굴을 맞추어 보려고 애를 쓴다.
이런 목소리에는 어떤 몸이 살 수 있을까? 어떤 눈이? 어떤 손이? 쓸데없는 짓이다. 뤼스는 은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고 뤼카가 말했다. 그러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다. 앞을 보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가끔 그들의 눈이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륀을 볼 수는 있어도 륀이 지는 고유한 목소리는 듣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다. --- pp.77~80
할아버지가 옷을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고 발코니를 넘어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담을 뛰어넘고, 마침내 니노의 오토바이에 앉는 일만 남았다.
이 모든 일은 아주 빨리 진행될 거다. 뤼카는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아 뒤따라오고, 니노의 오토바이 모터는 빠른 속오로 가열이 되겠지. 볼로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할아버지를 위해 백포도주를 준비했어?”
륀은 대답이 없다.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멈췄고, 자전거는 옆으로 미끄러지며 바닥에 멈춰 섰다. 자전거 앞바퀴는 여전히 공회전을 하고 있다.
앞서 들어선 건 니노였지만,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뤼카였다.
“할아버지가 죽었어.”
볼로, 자니? --- pp. 96~97
나는 다시 몸을 곧추세운다. 두 발로 작은 돌멩이들과 해초들을 건드려 본다. 이곳 물은 맑을 것이다. 내 발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발과 륀의 발, 그리고 다리, 륀의 몸 전체, 물 밖의 얼굴, 나와 마주 선 그 얼굴도 보일 것이다.
“뤼스.”
나는 그냥 이름을 불렀다. 그저 진짜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다.
뤼카와 니노는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주를 하고 있다. 미친 듯이 물을 가르는 소리가 수면을 파고든다.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슬렁거리던 볼로는 이내 모래 언덕 꼭대기로 사라져 버린다.
내가 널 잊었듯이 너도 날 잊고 있었구나.
나는 두 팔을 한껏 뻗어 륀을 품에 안는다. 내 품에 안긴 소녀. 내 예상이 맞았다. 기타를 품에 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신선한 공기를 한 움큼 들이마셔 허파를 빵빵하게 부풀린 다음, 하나로 얽힌 두 몸을 천천히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힌다.
자, 이제 숨을 쉬지 않고 키스를 해 보는 거다.
--- pp.148~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