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밝히는 지혜를 뜻하는 것 같다고 가르쳐 주고, 좀 어려운 프랑스 실존주의자였던 까뮈의 『이방인』으로 방향을 틀어 나갔다. 1960년대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던 소설임은 나이 많은 국어 선생들은 다들 잘 알 것이다.
“뫼루소우라는 청년이 햇빛이 너무 자기를 짜증나게 해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구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이들에게 나는 그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경찰이 그 뫼루소우를 체포하여 취조해 보니, 그는 어머니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장례를 치른 다음날 애인과 함께 바다에 가서 즐기다가 살인을 한 것이었다. 물론 정상참작도 받지 못해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무신론자인 그는 반성도 않고 신부로부터의 고해성사도 거부한 채 분노에 떨면서 부조리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고 말이다.
“햇빛이 짜증나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그런데, 제목을 이방인異邦人이라고 한 이유가 뭘까? 그리고 작가는 어떤 인간 탐구를 한 것일까, 그리고 『책상은 책상이다』의 작가는? 또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한 것인가요?”
쏟아지는 내 질문에 기가 질려 아이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는 놈들도 있긴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제 사춘기 2학년 여학생에게 인생의 비밀을 좀 알려 주려고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개 또는 지렁이와 서로 이방인이 아닐까? 개미와 민들레, 분꽃과 거미, 사마귀와 쉬땅나무, 청개구리와 왕원추리가 서로 이방인이듯 말이야. 우리가 다른 나라의 풍습과 종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듯이.”
라고 아이들을 깨우쳤다. 너무 자기 집착에만 빠져 있는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세속적이고 관습적인 삶을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들은 헷갈렸을까, 아니면 무엇인가 터득했을까? 궁금하다. 하지만 선생이란 깨우쳐 깨어나게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벌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자기 번데기의 껍질을 깨는 아픔이 따르고, 발상과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오른발에 파랑, 왼발엔 빨강 양말' 중에서
진송이는 환하게 웃었다. 복스러운 얼굴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풍성한 모란꽃이나 큼직한 불두화처럼……. 그처럼 탐스러운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진송아. 가을에 나무가 잎을 왜 떨어뜨리니?”
“…….”
“겨울 때문이란다. 겨울나무처럼 가난하게 사는 이웃들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야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가난하지만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말이지…….”
나는 진송이에게 나무를 이야기했다. 겨울나무에 담긴 철학을 말해 주었다. 그래서 진송이만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세상이 결코 달콤한 꿈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환상 같은 동화나 현실을 도피하려는 판타지에서 벗어나, 아픈 현실을 똑바로, 그리고 깊게 보기를 바랐다.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고 환하게 밝아지는 꽃이 되기를…….
--- '왜 선생님을 보지 않니'? 중에서
나는 다혜의 고민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리고 어느 날 복도에서 뒷모습을 보니 정신이나 감정도 조숙하지만, 다리도 튼튼하고, 몸도 성숙한 여인 같았다. 비록 단정한 여학교 교복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나는 수인囚人의 옷처럼 어두운 교복으로 둘러싸인 그 애의 감옥이 보이는 듯했다. 이런 나라에 사는 그 애의 고독과 권태가 아른거렸고, 고통스러운 슬픔도 느껴졌다. 마치 작은 화분에 갇혀서 수백 년을 살아야 하는 분재의 팽나무처럼…….
--- '어린 몽상가 다혜의 슬픔' 중에서
여학교에서 선생을 30년이나 해 왔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여자다. 깨 열매에서 방울소리를 듣는 다래를 보니 그 생각이 새삼스럽다. 특히 선생의 재단적인 눈을 벗어난 여자 아이들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자들이 수백 만 년 전부터 삶을 이어온 동물들, 이리나 쥐, 너구리, 아니면 고양이처럼 살기 위하여 자기 동물들의 습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데……. 자칫 은밀한 방울 소리를 못 듣고 넘어가지 않을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선생들이 할 일이지 않을까.
--- '들깨의 집 속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