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의 검이여, 본왕의 무력함은 뼈저리게 느꼈다.”
……꼭 말을 저런 식으로 해야 할까. 좀 오글거리지 않나.
“비록 본왕의 패배는 인정하나 그대를 이대로 놓아주기에는…….”
“본론만 말해, 본론만.”
“야!”
“왜.”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무슨 고전극 관람하는 것도 아니고 지루하게 뭔 짓이라냐. 마왕 A 모 씨는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니까 너를 이대로 무사히 보내 줄 수는 없다고!”
“말은 바로 하자, 보내 주는 게 아니라 네놈이 도망치는 거겠지.”
“도, 도망 안 쳐! 안 친다고!”
“도망 안 치면 이대로 세월아 네월아 서로 얼굴이나 멀뚱히 쳐다보며 서 있자고?”
“크윽, 두고 봐라! 곧 후회하게 될 터이니!”
……방패 던질까. 한 손에 든 방패를 두 손으로 움켜쥐자 마왕 놈이 눈치 빠르게 건물의 잔해 뒤로 피신했다. 쳇. 무너져 내린 지붕의 일부 너머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마왕이 다시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너의 육신은 해할 수 없으나 너의 영혼은 다르지!”
“……뭐?”
영혼이라니? 저 새끼가? 나는 위협적으로 방패를 휘둘렀고 마왕은 재빨리 머리를 쏙 집어넣었다.
“명색이 마왕인 만큼 제물로 받은 인간이 여럿 있지.”
“나쁜 새끼네. 노예제도 사라진 마당에 인간 제물이냐. 언제 적 이야기야, 그거?”
“그중에는 가녀린 소녀 또한 존재한다.”
“내 말 씹냐.”
“본왕과 계약한 소녀의 영혼을 끌어와 여신의 검, 네놈 몸에 집어넣…….”
콰앙!
내 손에서 날아간 방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물의 잔해를 3분의 2쯤 파고들었다. 쳇, 역시 부족한가. 한때 지붕의 일부분이었던 돌무더기들이 다시금 우수수 부서져 내리고 먼지구름이 뿌옇게 피어오른다. 그 사이로 기겁한 마왕이 바닥을 발발 기는 것이 보였다.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무식한 인간 같으니라고!”
“멀쩡한 사람 영혼을 빼내려는 새끼가 누구더러 무식하대?”
“아무튼 네놈의 영혼을 연약한 소녀와 바꾸어 놓겠다! 제아무리 강력한 성기사의 영혼일지라도 건장한 사내가 아닌 가녀린 여인의 육신에 갇히게 된다면 본래 힘의 절반도 되찾지 못할 터!”
“뭐? 너 인마, 나는……!”
“마계의 평화를 위하여 이 한 몸 희생하리라!”
……마왕 주제에 무슨 순국열사처럼 지껄이고 있네. 놈은 재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나는 불길한 빛에 휘감기며 마지막 외침을 남겼다.
“개새끼야! 나 여자라고!” ---「1권」본문 중에서
“……로엘이 위험해지는 것도 싫지만, 미움받는 것도 싫어.”
“미워하진 않을 겁니다.”
미움받기 싫으면 날 억지로 데리고 도망치는 거 관두라고 해야 맞겠지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안 미워해요.”
“내가 억지로, 잡아가도?”
“네.”
“……어째서?”
“지금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니까요. 변한 게 없는데 왜 미워지겠습니까.”
확 돌변해서 뻔뻔한 얼굴로 날 납치해 가면 이게 누구야, 내가 알던 단장이 아닌데 하면서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약혼자는 간절히 원하는 일도 날 생각해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사람이니까. 애초에 이러는 이유 자체가 내가 걱정되어서기도 하고.
“그리고요, 결국 도망 못 칠 거잖아요.”
“아니야, 나는……!”
두 팔을 뻗어 유시스 단장을 마주 꼭 끌어안아 주었다.
“할 수 있다면 해도 됩니다. 물론 난 반대할 거고, 억지로 붙잡아도 도망치려 들 테지만 당신을 싫어하거나 미워하진 않을 거예요.”
“……로엘.”
이런, 결국 우는 거 같다. 내가 또 울려 버렸구만. 이러면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고. 진짜 억지로 날 납치할 수 있는 성격이었음 걱정이라도 덜 하지. 뭐, 그런 유시스 단장이라면 지금만큼 좋아하지는 않았을 거 같지만.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하니까, 오히려 못 하겠어…….”
“그럼 안 하면 되죠.”
“하지만 무서워, 혹시라도…….”
“괜찮을 겁니다.”
“……나보다 먼저 죽지 마, 제발.”
“노력할게요.”
뒤늦게 어깨가 젖어 들었다. 갑옷에 막힌 눈물이 안쪽까지 스며든 모양이었다. 그는 제법 오래 조용히 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단장이 울면 곤란해지기는 하지만 젖은 눈동자는 언제 봐도 무척이나 곱다. 비 오는 날 하늘의 색이라서일까 물기 어려 있는 게 어울려.
“……미안하다.”
“미안할 거 하나도 없는데요. 나는 이런 당신이 좋은 겁니다. 자, 나한테 키스하세요.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서 결혼이나 하죠.”
---「2권」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