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 근무에서 이보다 더 동떨어진 일이 과연 존재할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근접한 경험을 머리에 떠올리려고 해 보아도, 기껏해야 덴다리 산맥에서 했던 동굴 탐험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우주가 불과 공기라면, 이건 땅과 물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마일즈는 엄청나게 많은 음기(陰氣)를 빨아들였을 것이 뻔하므로, 나중에 양기로 이걸 되돌려 받을 때는 웬만한 양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손전등을 꽉 쥐고 무릎을 꿇은 다음 배수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검은 전투복 바지의 무르팍이 차가운 물로 흠뻑 젖었다. 감각이 사라질 정도였다. 한쪽 장갑의 손목으로 물이 들어왔다. 손목을 칼날로 긋는 느낌이다.
…(중략)…
마일즈는 배수관 벽을 스치며 모퉁이를 돌았고, 배수관을 막은 물체를 향해 손전등 빛을 비췄다. 그리고 그 순간 화들짝 뒤로 물러나며 욕설을 내뱉었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에 조금 더 자세히 그 물체를 관찰하고는 뒷걸음질치며 밖으로 나왔다.
배수로 바닥에 서서 우두둑거리는 등뼈를 하나씩 폈다. 올니 병장이 위쪽의 도로 난간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고 물었다. “뭐가 박혀 있습니까, 소위님?”
한숨 돌린 마일즈는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장화 두 짝.”
“고작 그뿐입니까?”
“그 주인은 아직도 그걸 신고 있어.”
--- pp.75~76
마일즈는 현재 자신이 어떤 입장에 놓였는지를 그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뱃속에 납덩어리라도 든 기분이다. 바라야 황제가 지금 이 순간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전 우주에서도 나밖에 없다. 만약 그레고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난 그레고르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 사실 그레고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내가…….
그리고 헤겐 허브가 그레고르의 정체를 알아차린다면, 거의 서사시를 방불케 하는 장대한 규모의 난투극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잭슨인들은 단순히 그를 붙잡아 몸값을 요구하려고 할 것이다. 애슬룬드, 폴, 버베인은…… 이들 중 하나는, 혹은 이들 모두는 그레고르를 장기의 말로 삼아 이런저런 권력 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세타간다인들은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레고르를 손에 넣으려고 할 것이 뻔하다---일단 그들이 그레고르를 은밀하게 수중에 넣는다면, 도대체 얼마나 교묘한 심리적 조작을 가하려고 할까? 반대로 공공연하게 손에 넣는다면, 어떤 위협을 가해 올까? 게다가 마일즈와 그레고르 두 사람은 그들이 통제 밖에 있는 우주선에 갇혀 있었다. 마일즈는 언제든 컨소시엄의 깡패들에게 잡혀가거나 혹은 그보다 끔찍한 꼴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러나 지금 마일즈는 제국군 정보사령부의 장교이다. 아무리 계급이 낮고, 상관의 눈 밖에 난 존재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정보사의 신성한 임무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제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황제, 통일 바라야의 상징을 말이다. 그레고르 본인은 억지로 그 틀에 끼워맞춰진 인간이다. 마일즈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상징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양쪽 다야. 그레고르는 내 거야. 지금은 도주 중이고, 누군지도 모를 적들의 추적을 받고 있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의 울증에 걸려 있는 사내. 이런 것들을 모두 합쳐서 내 거야.
마일즈는 미친 듯한 홍소(哄笑)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 pp.226~227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더 풍부해.” 엘레나는 메마른 어조로 지적했다. “흐음……. 실제 전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멍청하고 단순했어. 두 적수가 우주에서 조우하기 위해서 그토록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을 여유가 있다면, 그 노력의 10분의1이라도 협상에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그건 게릴라전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엘레나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게릴라는 정해진 규칙을 따라 적과 싸울 용의가 없는 자야. 오히려 그쪽이 더 사리에 맞는 것 같아. 어차피 악랄한 짓을 할 작정이라면, 철저하게 끝까지 악랄해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아까 그 세 번째 계약 얘긴데, 앞으로 또 다른 게릴라전에 참가할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게릴라 편에서 싸우고 싶어.”
“철저하게 악랄한 적수끼리는 결코 화해하기가 쉽지 않아.” 마일즈는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구제 불가능한 파멸적 상황으로까지 추락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전쟁 자체가 목적인 경우는 없어. 전쟁을 일으키는 건 평화를 얻기 위해서거든. 처음에 자기들이 누리던 평화보다 더 나은 평화를 말야.”
--- p.280
카빌로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이는…… 후계자가 없다고 했어. 너도 그렇게 말했잖아.”
“후계자로 지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야. 우리 아버지가 지명 받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혈통이 딸려서 그러는 게 아냐. 하지만 무시한다고 해서 혈통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지. 그리고 난 우리 아버지가 낳은 유일한 자식이고, 그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도 아냐. 고로…… 그렇게 된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내가 보내는 나포조에 저항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저항하라고. 위협해서 쫓아낼 수 있으면 위협해 봐. 위협을 실행에 옮겨도 좋아.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 제국을 선물해 줘. 그러면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해 줄게. 당신을 즉결처분하기 전에 말야. 바라야 황제 마일즈 1세. 어감이 어때? 카빌로 황후만큼이나 듣기 좋아?” 마일즈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혹은,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일하는 수도 있어. 보르코시건 가문은 전통적으로 명분보다는 실익 쪽을 더 선호해 왔으니까. 우리 아버지처럼 제위 뒤에서 흑막으로 군림하는 거지---그리고 보나마나 그레고르한테 들었겠지만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권력을 너무 오래 차지하고 있었어---그렇다고 해서, 행여나 속눈썹을 깜박이며 우리 아버지를 유혹할 생각은 하지 마. 여자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작자니까. 하지만 난 아버지의 약점들을 샅샅들이 알고 있어. 철저하게 생각해 봤거든. 그러니까 이번 일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할 거야. 그건 그렇고 밀레디, 당신 황제하고 결혼할 수만 있다면 결혼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지 않아?”
타임래그 덕택에 그녀의 표정 변화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마일즈의 그럴듯한 중상모략은 효과 만점이었다. 경악, 혐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지못한 경의.
--- pp.416~417
카빌로가 상체를 수그리며 갑자기 끼어들었다. “자, 이걸로 저자의 배신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어. 아까 저자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좀 재생해서 보여줄게, 그렉.” 카빌로가 그레고르 앞으로 손을 내밀어 제어반을 만지자, 마일즈의 눈앞에 아까 그가 한 숨가쁜 선동 연설의 재생 영상이 펼쳐졌다. 영상은 예상했던 대로 후계자 지정에 관한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시작됐고, 그레고르 대신 내가 황제가 될 테니 나와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으로 끝났다.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고, 편집한 징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레고르는 사려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이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마일즈의 조그만 이미지가 예의 파렴치한 결론을 웅얼거리는 것을 들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 걸 보고 놀랐단 말야, 캐비?” 그레고르는 태연자약한 어조로 말하며 카빌로의 손을 잡았고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빌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건데, 그녀가 뭔가에 놀란 것만은 틀림없었다. “보르코시건 경이 돌연변이의 영향으로 미쳐버렸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야! 벌써 몇 년째 저런 식으로 혼자 중얼중얼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물론 나는 저 인간을 그 키만큼도 신뢰하지 않지만---”
고마워 그레고르. 방금 뭐라고 했는지 잊지 않겠어.
--- pp.419~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