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사고를 당한 장소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그 섬뜩한 진홍색 웅덩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로 옆에는 소녀가 걸고 있던 하늘색 구슬 목걸이가 부서진 채 흩어져 있었다. 호랑이가 지나간 흔적이 또렷하게 보였다. 길 한쪽에는 축 늘어진 소녀의 머리가 남긴 흔적이 피와 함께, 그리고 반대쪽에는 가냘픈 다리가 땅바닥에 질질 끌리며 남긴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 산 위로 700~800m 올라간 곳에서 소녀의 윗옷이 발견되었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치마가 발견되었다. 이번에도 호랑이는 나체의 여자를 물고 다닌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상태에서 악몽처럼 끌려 다녔던 지난번 희생자와는 달리 이번 소녀는 '다행히도' 이미 죽은 상태였다.
산언저리에 이르러 흔적은 산사나무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 뾰족한 가시에는 소녀의 길고 까만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다. 호랑이는 그 너머 쐬기풀 숲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 마땅한 우회로를 찾지 못한 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쐐기풀 숲으로 들어갔다. 핏자국은 쐐기풀 너머에서 급하게 왼쪽으로 돌아 험준한 산 아래로 곧장 나 있었고, 땅 위에는 고사리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100m쯤 내려가자 핏자국은 좁고 가파른 개울 속으로 들어갔다. 돌과 흙들이 이리저리 파헤져친 걸 보니 거기서부터는 호랑이도 힘들게 나아간 것 같았다. 다시 개울을 따라 500m 정도 내려갔다.
(...) 나는 다시 개울을 따라 내려갔다. 바위를 끼고 돌던 개울물은 100m 정도 흘러내린 다음 왼쪽으로 나오는 깊은 골짜기와 만나고 있었다. 연결 지점에서는 작은 웅덩이가 있었고, 주변에는 곳곳에 피가 얼룩져 있었다. 호랑이는 소녀를 곧장 여기까지 물고 왔고, 나의 끈질긴 추적이 그의 식사를 방해했던 것이다. 토막 난 뼈들이 깊게 패인 호랑이 발자국 주위에 흩어져 있었고, 그 속으로 붉은색 물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웅덩이 가장자리에는 내가 아까부터 이상하게 여기던 물체가 일었다. 멀리서 볼 때 희끗하게 보이던 그 물체는 다름 아닌 사람의 다리였다. 나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식인동물을 사냥했지만 그 젊고 예쁜 다리만큼 가엾은 광경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 무릎 바로 아래에서 마치 도끼로 자른 듯 깨끗하게 잘려 있는 그 다리의 절단면에서는 그때까지도 따뜻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pp 23~24
잠시 후, 어디선가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탁 하고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은 조금 전에 삼바 사슴이 울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는 그 사슴이 나뭇가지를 일부러 부러뜨렸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녀석은 정확한 신호음을 통해 호랑이가 밀림 속으로 들어왔음을 모든 동물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나는 즉시 낮게 엎드린 채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그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의 관목들은 높이가 거의 2~3m에 달했다. 위쪽 가지들에는 잎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지만 줄기에는 그다지 많은 잎이 달려 있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그 잎사귀들 사이로 3~4m 앞을 또렷이 내다볼 수 있었다. 나는 호랑이가 나타나더라도 제발 앞쪽에서 공격을 해오길 간절히 바랐다. 나무들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는 도저히 총을 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0~30m 전방을 향해 라이플 총을 조준하고 있던 나는 햇빛을 받고 있는 위쪽 잎사귀들 사이로 뭔가 붉은 물체가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냥 낙엽 뭉치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 호랑이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약간 이동하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2m 정도를 기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바로 그 순간, 눈앞에 그 호랑이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 몸을 웅크린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곧바로 발사한 두 발의 총알을 맞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옆쪽으로 뒹굴며 쓰러져 버렸다. 어마어마하게 큰 호랑이의 몸집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 '파월가의 독신자'가 나흘 전에 내가 쏜 총에 머리를 맞은 그 호랑이가 맞는지 확인했다.
총알 자국은 머리 가죽의 주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놈의 머리 뒤쪽에는 총알이 관통하면서 생긴 커다른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 참혹한 상처! 그리고 저 끈질길 생명력! 내가 쏜 짐승 앞에서 그토록 커다란 경의를 느껴 본 것은 맹세코 그때가 처음이었다.
--- pp 122~123
협곡의 넓이는 약 10m, 깊이는 1.5m 정도였다. 그리로 내려가면서 내가 바위 하나에 손을 짚자 갑자기 쏙독새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녀석이 숨어 있던 바위 틈새에는 알이 두 개 놓여져 있었다. 담황색 껍질에 짙은 갈색 반점들이 찍혀 있는, 아주 보기 드문 새알이었다. 둘 중 하나는 럭비공처럼 길고 뾰족했고, 다른 하나는 마치 대리석을 깎아놓은 것처럼 둥그스름했다.
나는 그 신기한 알들을 내 수집품 목록에 추가하기로 했다. 일단 왼손을 찻잔 모양으로 오므려서 알들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다음 이끼를 조금 뜯어서 그것들을 감쌌다. 어미 새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 알들은 아주 따뜻했다.
--- pp 94~95
호랑이는 인간의 후각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다른 야생 동물들을 노릴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들을 위협한다. 바람을 거슬러서 자기가 노리는 먹잇감에 접근하거나, 아니면 바람이 불어 가는 방향에서 먹잇감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잠복하는 것이 놈들의 습성이다. 사냥꾼이 호랑이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놈은 사냥꾼에게 몰래 다가가고 있거나 아니면 숨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그 싸움은 사냥꾼에게 매우 불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몰래 접근하거나 매복을 이용해서 공격을 할 경우, 호랑이는 항상 희생자의 뒤편에서 접근한다. 그러므로 서투른 사냥꾼이 울창한 밀림 속으로 무작정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어딘가에서 식인 호랑이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 사냥꾼이 공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이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는 십중팔구 호랑이 밥이 되고 만다.
--- pp 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