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부치지 못한 편지
순이야.
일본 왕이 연합국 측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는 소식에 징용노동자 합숙소에 있던 사람들 모두 만세를 불렀어. 전쟁이 끝났다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하면서.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또…….
합숙소에서 태어나 이 합숙소, 저 합숙소를 옮겨 다니며 자란 너는 드디어 집에 가게 되었다며 널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엄마가 많이 낯설었지. 솔직히 너야 고향이나 집에 가게 되었다는 것보다는 철조망이 겹겹이 둘러쳐진 합숙소를 나가게 되었다는 기대가 백배 천배는 더 컸을 거야. 그러면서도 집이라는 말에, 고향이라는 말에 가슴 한 구석에 설렘이랄까, 그리움 같은 게 밀물처럼 밀려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지. 너는 합숙소철조망을 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민들레홀씨를 향해 가만가만 손을 흔들어주었어.
고향에 가면 제일 먼저 전차를 타보고 싶다 그랬지. 경성시내 구경도 하고, 아버지가 다니던 대학에도 가보고. 엄마고향에도 가보고 싶댔지. 아우라지 구경도 하고, 바세나루에서 줄배도 타보고. 엄마가 등하교 때마다 걸어 넘었다는 물레재도 가보고, 장군봉과 투구봉도 올라가보고. 돌꽝으로 잡은 꺽지와 미유기를 모닥불에 구워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라지.
석구야.
할머니하고 누나를 따라 서커스구경을 갔다가 붙잡혀왔다지. 할머니와 누나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몰라 밤새 훌쩍거리다가 들켜 일주일을 꼬박 굶기도 했고.
오천 명? 만 명? 이만 명? 오미나토항에 도착해, 부두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얼마나 놀랬을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 땅에 끌려와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22일에 되어서야 널 아들처럼 챙겨주는 여주댁 아줌마를 따라, 향분언니와 뻘쭉이 아저씨를 따라,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우키시마호에 탈 수 있었지. 할머니가 너무너무 그리워서. 누나도 보고 싶었고.
인수야, 인정아.
고향의 시장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일본경찰한테 붙잡히셨다고. 포승줄에 묶인 아버지를 앞세우고 들이닥친 경찰이 다짜고짜 어머니와 너희들까지 끌어냈고. 그리고 몇 날 며칠을 배 짐칸에 실려 홋카이도 벌목장으로 끌려갔고, 감시원들이 시키는 대로 죽어라 일을 했어. 그런데 나뭇짐을 지고 산비탈을 내려가던 어머니가 발을 헛디뎌 비탈을 굴렀지. 감시원들이 떼로 덤벼들더니 발길질에, 몽둥이에……. 아버지가 달려갔을 땐 어머니는 이미 이세상사람이 아니었어.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어. 아버지는 뼛가루나마 고향땅에 뿌려줘야겠다며 어머니의 유골상자를 품에 안은 채 귀국선에 탔어.
창하나가 없었어. 발 뻗고 누울 틈도 없었어. 한여름 찜통더위에다, 사람들이 내쉬는 숨조차 이내 땀으로 변할 만큼 후끈거렸지. 땀 냄새, 배설물 썩는 냄새까지 뒤섞여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어. 쥐 여러 마리가 굵고 가는 관들을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있었고. 그런데도 고향에 간다는 설렘에 모두들 흥겨운 노래를 불렀고, 서로에게 기대 잠을 청할 수 있었어.
달래, 냉이야.
언니오빠들과 갑판에서 숨바꼭질놀이를 하고 있었지. 그러다 느닷없는 고함과 호루라기소리에 떠밀려 화물칸으로 쫓겨 들어갔어. 얼마쯤 지났을까. 폭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이 났어. 바닥이 벽이 되고 벽이 천장이 되고, 천장은 바닥이 되었어. 갈라지고 터진 벽 틈새로 파란하늘이, 비릿한 바닷물이 새어들었어. 시커먼 기름덩이가 뱅뱅 돌며 사람들을 뻘건 불바다로 떠다밀었지.
저만치, 구명보트 여러 대가 해안가를 향하고 있었어. 보트마다 일본인승무원이 가득가득 실려 있었어. 백 아니, 이백 명도 훨씬 넘을 것 같았지. 아무리 음료수가 급하대도 배가 폭파돼 침몰하든 말든, 사람들이 죽든 말든,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자기네들끼리만 가버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 어렴풋한 폭음이 바다 속을 집어삼키며 소용돌이쳤어. 뱃머리난간을 향해 기어오르던 사람들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찢기고 터진 철판과 관들이 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덮쳤고. 살려달란 소리조차 지를 수가 없었어.
인정이의 구슬팔찌가 물에 둥둥 떠 있었어. 색색의 구슬이 햇살에 부딪치며 오색찬란한 꽃잎을 게워냈지.
순이야. 석구야. 인수야, 인정아. 달래, 냉이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너희들을 갑판에 불러 모아 숨바꼭질을 하며 놀게 했어.
“못찾겠다 꾀꼬리.”
“못찾겠다 꾀꼬리 항아리 쓰고 나와라.”
너희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려니 가슴이 먹먹해지는 게, 어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몇 번을 펜을 놓은 채 펑펑 울었는지 몰라.
순이야, 미안해. 석구야, 인수야, 미안해. 인정아, 달래, 냉이야, 정말 정말 미안해.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며 나는 마음을 다해 빌고 또 빌어. 아직도 식민지 바다를 떠다니고 있는 너희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손 내밀 수 있기를. 너희들 모두 집으로, 고향으로 데려다줄 수 있기를. 약속할게.
2008년 여름에 김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