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에 새겨진 북극삼성에서 조선 초의 석관 천문도에 나타나는 별자리까지
우리의 하늘과 별자리에 담긴 무수한 논쟁거리와 이야기들.
한국과 동양의 역사천문학을 정리한 국내 최대의 전통천문 학술서
중국 별자리에서 발견되지 않은 카시오페이아자리가 왜 고대 한국의 별자리 그림에는 나타났을까? 우리 조상은 왜 고인돌에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와 함께 윷판을 새겼을까? 고구려 멸망 수십 년 후에 세워진 교토의 기토라 고분에 어떻게 고구려 평양성 위도에서 관측한 전천 천문도가 그려져 있었을까? 고구려 천문 문화는 고려시대에 어떤 양상으로 계승되고 재해석되었을까? 점차 다양해지던 전통 천문이 고려-조선 왕조교체기에 맥이 끊긴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실학자들은 서양 천문학을 어떻게 또 얼마나 받아들였을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에는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서양식 별자리 이름이 가득하다.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의 하늘에는 어떤 존재들이 있었을까? 이 책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 천문의 역사를 방대하게 다루었다. 전통시대의 천문이 천체학 중심의 현대 천문학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기에 여기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던 천문과 하늘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관점을 발굴하고 해석했다. 이 책은 우리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천문이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했는지 들여다볼 수 있도록 천문의 영역이 어떤 맥락으로 어떠한 자료로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깊이 있게 풀어냈다.
천문에 관한 그림 자료도 230여 점을 실어 전통 천문의 상을 쉽게 그려볼 수 있게 하였다. 고인돌과 무덤 석관 등에 새겨진 고구려식 북극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 천문도, 고려와 조선초의 치성광불화뿐 아니라 고려에 대한 북한의 조사 보고서나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의 발굴조사 자료, 중국의 천문자료,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신법천문도 등 우리 조상들의 천문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담았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해방 이후 간헐적으로 접근되던 우리 역사 속의 천문 연구를 본격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1차 자료 발굴과 관점의 개발 등을 통하여 천문학과 역사학을 넘나들며 그 기초를 닦았다. 이로써 우리가 잊어버렸던 우리 역사 속의 하늘과 천문을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책에서 최초로 밝혀낸 천문 자료와 연구 성과
이 책에는 그동안 저자가 전통천문학에서 밝혀낸 새로운 성과를 수록했다.
선사시대 별자리 유적인 고인돌과 암각화에 나타난 별자리 성혈 자료를 발굴 분석했다
신라의 승려 원효와 경흥을 통하여 통일신라시기에 인도 달력을 사용하였음을 밝혀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별자리와 금박 천문도를 소개하고 분석했다
고구려 천문도의 중심이 중국(북극5성)과 달리 북극3성이며, 천문도의 W형 별자리가 카시오페이아자리임을 규명하여 고구려가 독자적 관측학 전통을 수립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고려의 석관천문도에서는 고구려와 똑같이 W 모양의 카시오페이아자리를 그렸다
고려시대 천문을 담당한 사천대에서는 천문 관측과 재변 해석에 『천지서상지』를 사용했다
고려 왕릉과 벽화 천문도에는 고구려에서 이어받은 고구려의 북극3성이 그려 있다
고려 왕실에서 별자리 제사를 지내면서 사용하였을 천문 판테온의 체계를 유물자료로서 처음으로 확인시켜 주는 〈치성광여래왕림도〉라는 불교식 천문도를 발굴했다
김시습의 ??매월당집??을 통해 조선초 소격서에서 사용했을 천문 관련 경전을 밝혀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사이에는 휴대용 천문도이자 신법 천문도인 「방성도」가 유행했다
자료① 천문의 역사와 관련된 기존 학설을 바꾸는 새로운 관점
흔히 칠성신앙이 매우 오래 전에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증거를 사찰의 칠성각에서 찾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찰에 반드시 설치되는 칠성각은 불과 조선 후기 무렵부터 생긴 새로운 문화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전신이 태조 왕건 초부터 건립되어 고려시대를 풍미한 구요당으로 분석되었다. 칠성각에 주불 탱화로 안치되는 칠성탱 양식은 조선 후기에 새로 도입된 불화이며, 그 이전에는 치성광불화가 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연구되었다. 또한 치성광불화의 중심은 북두칠성이 아니라 구요(십일요)여서, 칠성신앙의 유행 역시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접근되었다.
고려와 조선 초기의 「치성광불화」는 불교식 천문도이자 조선 후기 사찰에 유행하는 칠성탱화의 전신이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고려사』에 빈번하게 설행된 초례, 곧 고려 왕실의 별자리 제사 기록을 분석한 결과, 의종 6년 수창궁 명인전에서 초례 지냈다는 ‘칠이성신(七二星神)’이 치성광불화에 그려진 ‘북극성, 일월, 오성, 사요, 북두칠성, 남두육성, 삼태육성, 노인성, 십이지궁, 이십팔수’를 합칭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전통시대 별자리 신앙 중에서 널리 믿어졌던 삼태성, 남두육성 등에 대해 처음으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흔히 오리온 벨트로 알려져 있는 삼태성은 3개의 별이 아니라 6개의 별로 된 삼태육성을 간칭한 것이며 북극성 부근에 있다. 북두칠성과 묶여 등장하는 남두육성은 인간을 길러내는 역할을 맡았던 별자리이다. 서양에서 전래된 황도12궁이 동아시아에서는 어떻게 변천되었으며 중국과 고려에서 그에 관한 지식이 유통된 과정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구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신앙의 대상이던 가장 높은 하늘 임금(천제)에 대한 역사가 처음으로 연구되었다. 『고려사』 등을 통해 가장 비중 있는 천제가 황천상제와 태일신이었으며, 이규보의 문집 등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천황대제는 고려 후기에 부상한 새로운 신격으로 고려의 군신이자 국가 수호신이었음을 밝혀냈다. 조선조 들어서 이들 대신 옥황상제가 새로운 천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선조 2년작 치성광불화와 조선의 『명종실록』, 소격서의 자료 등을 통해 확인했다. 이러한 지고신의 변동 역사 바탕에는 25,800년 동안 하늘이 한 바퀴를 도는 천문 현상(세차운동)에 대한 관측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인식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것은 여말선초에 부상한 성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성리학에서 우주론의 핵심으로 태극 이론이 부각되었는데, 이러한 흔적이 고려말의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고려말 공민왕릉과 석관 천문도 등에서 천문의 중심인 북극3성이 태극상으로 변모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시대의 변화상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곧 고려가 천문의 우주론을 추구했다면 조선은 비천문의 태극 관념론을 추구했던 것이다.
조선 숙종대에 벌어진 미륵신앙 사건을 통하여 조선 후반에 전통 별자리 신앙의 중심이 북두칠성에 집중되는 현상을 확인했다. 고려시대에 판테온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칠성이 조선 후기에 와서는 모든 천신의 기능을 한꺼번에 포괄하는 매우 영향력이 큰 존재로 확장되고 있었다. 현대 민간의 별자리 신앙은 이런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등을 분석한 결과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새로이 유입된 신법 천문도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과 만나 그 천문지식을 소화하고 있었음을 밝혔으며, 청에서 들어온 「방성도」 연구를 통해 이를 거듭 확인했다.
자료② 고대 한국의 별자리 그림은 어떻게 중국과 달랐을까?
고대 한국과 고대 중국은 같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있었음에도 밤하늘의 별자리를 서로 달리 인식했다. 한국은 북극성 별자리를 북극삼성(北極三星)으로 보았으며 중국은 진한대에는 천극사성(天極四星)으로, 당송대에는 북극오성(北極五星)으로 생각했다. 한국식 북극성 별자리인 북극삼성은 상고시대의 고인돌부터 고구려 벽화를 거쳐 고려의 능묘 천문도, 조선초의 석관 천문도까지 오랜 세월 동안 끊어질 듯하면서도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
또한 밤하늘에서 보이는 그대로 카시오페이아자리를 새긴 고대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이를 왕량성, 각도성, 책성으로 분리하여 인식했으며, 따라서 서양의 천문지식이 도입되기 전 중국식 천문도에서는 카시오페이아자리가 등장하지 않았다. 이렇게 계승되는 별자리는 중국 천문학에 장악되는 조선시대 전까지 끊임없이 나타나 우리 고유의 문화성이 계승되고 발전되는 양상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고려 20대 신종의 양릉(陽陵) 천문도에서는 천문도 중심부에 북두칠성과 북극삼성을 그려 두었다. 이것은 안동 서삼동 고려 벽화묘와 파주 서곡리 고려 벽화묘의 천장부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별자리 구조다. 고구려 역시 평양시 진파리 4호분의 전천 천문도에서 보이듯이 천문도 중심에 북두칠성과 북극삼성을 그렸다. 말하자면 고구려의 천문 전통이 고려의 벽화묘로 그대로 전승되었던 것인데, 그 천문 형식은 북극3성과 북두7성의 두 별자리를 천문도 중궁(中宮)의 핵심 별자리로 안치한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당송대 고천문도가 북극삼성이 아니라 북극오성을, 북두칠성 대신에 사보(四輔)4성을 천문 중궁의 핵심 별자리로 삼는 것과 대조되는 측면이다. 이에 필자는 고구려와 고려의 ‘북극3성―북두7성’ 천문과 당송의 ‘북극5성―사보4성’ 천문이 각기 다른 전통이며 대립되는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46쪽)
자료③ 선사시대 고인돌에 북두칠성 대신 윷판이 새겨진 까닭은 무엇인가?
선사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한반도의 고인돌에서는 사시사철 보이는 별자리들을 새긴 별자리형 암각화가 많이 발견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암각화(바위그림)들에 카시오페이아자리와 북극성 별자리를 새기면서 카시오페이아자리의 별 각도까지 매우 정확하게 남길 정도로 대단히 사실적으로 관측했다. 그런데 왜 카시오페이아자리의 대척점, 즉 북두칠성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윷판을 새겼을까?
이 별자리의 북극성 너머 대척점에 기대하던 북두칠성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에 원형의 윷판 도형 한 점이 새겨져 있었다. 카시오페이아 성혈에서 북극성 성혈까지 120센티미터 거리였고, 북극성에서 윷판 성혈까지 거리도 120센티미터였다. 거의 북두칠성 위치에 윷판 도형이 새겨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새로 드러난 바위면에서 윷판 그림 여러 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 이 새로운 현상을 관찰하면서 처음으로 북두칠성과 윷판을 연관지었고, 그런 끝에 윷판 도형이 북두칠성의 사계절 사방위 주천운행도에서 창안되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35쪽)
자료④ 조선의 실학자들은 서양 천문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은 청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서양의 천문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얼마나 소화했을까?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해남 녹우당에서 발굴된 인쇄본 「방성도」와, 서울역사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필사본 〈방성도〉를 분석한 결과, 필사본에 은하수를 그려넣고 간이 관측용 성도로 쓰인 흔적이 있는 신법천문도는 북학파들의 천문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방성도는 전통적인 개천식 방식을 버리고 천구를 일종의 육면체로 파악하여, 북극권과 남극권을 1장씩으로, 적도 주변부를 4장으로 분리했다.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있는 방성도라는 글을 보면, 실학자들은 서양 천문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천체구조론과 도법상의 특징이 어떻게 다른지 또 신법천문도의 천문학적 의의가 무엇인지 잘 인식하고 있었다.
성호는 “육편(六片)의 방성도는 서국(西國)에서 나온 것이요, 중국 사람이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서국방성도’의 역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방성도」라는 글에서, “지금 서국(西國)의 방성도를 보면 중국의 것과 다르다. 더러는 연결한 선만 있고 별은 없는데 이는 그곳에서 망원경으로 관측한 것이다. …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닌즉, 그대로 따라야 한다.”라 하여, 방성도의 천문학적 우수성을 긍정했다. (465쪽)
자료⑤ 점차 다양해지던 우리 전통 천문이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에 맥이 끊긴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 건국은 단순히 왕조가 교체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서 분명한 시대적 변화를 보여 주었다. 고려시대에는 호천상제와 자미북극대제, 천황대제, 옥황 등 다양한 지고신을 섬겼으며 도교적 재초 의례, 불교적 도량 의례, 무속적 기우 의례 등 다양한 국가 제천례를 통해 다원화된 우주론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제천의례를 제외한 모든 국가 제천례를 포기했으며, 존화종법적인 자의식 때문에 소격서와 소격전을 혁파하여 유교적 제천의례마저 폐지하고 말았다.
조선 전기에 이 같은 일련의 제천 혁파 과정이 전반적으로 성공을 거둠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국가 제천과 같은 공식적인 예전을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삼국시대 전부터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제천의 중요성과 제천의 통로가 확대 일로를 걸어오다가 조선조에 들어서 공적인 하늘의 상실로 마무리된 것이다. … 제천례가 지속되었다면, 분명 제천의 주신 문제와 제장 문제, 제천 시기 문제 등 매우 구체적이고 교류적인 천론들이 개진되었을 테지만 이런 논의를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 되고 말았다. (367쪽)
자료⑥ 고구려의 천문사상을 계승하고 재해석한 고려시대
고려 태조 왕건의 능부터 고구려와 유사한 천문 시스템을 구축하여 천장에는 천문성수도를, 묘실 사방 벽면에는 사신도를 그렸으며, 고려 말 공민왕릉에 이르기까지 능묘에 천문사상을 표출했다. 거기에다 신라에서 유래한 십이지신상을 묘석에 새기고 후기에는 문왕팔괘도와 같은 역론적 우주론의 흔적을 보여 주는 등 중첩된 체계를 통해 우주론을 다변화해 갔다. 고려 능묘 22기에 나타난 천문성수를 분석한 결과, 고려는 통일신라와 고구려를 모두 계승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퍼지며 중국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이 크게 나빠지고 있으며, 우리 역사의 일부인 고구려를 빼앗기지 않도록 학술적인 연구를 심화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가 아님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004년 12월 22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한중 학자들이 모여 고구려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를 열어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이 학술회의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천문도의 별자리는 중국의 별자리와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랫동안 고구려 천문학에 천착했고 우리 역사 천문학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학문적 근거가 될 수 있는 사실을 발표한 저자는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를 연구하면서 … 별자리가 시대상과 문화상을 담고 있는 역사 해석의 중요한 주제”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