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그 어떤 주의도 거부한 사람이고, 그 어떤 사상도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아니, 그는 모든 주의나 사상을 철저히 파괴한 사람이다. 그는 철저한 파괴자다. 그렇게 파괴적인 사람이 역사에서, 특히 고상한 종교와 학문과 예술의 역사에서 달리 찾을 수 없기에 니체가 너무나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샌님 같은 종교인, 학자, 예술가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깡패 같은 말을 퍼붓는 니체에게 매료되기 십상이다. 아니, 적어도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니체의 파괴는 위험하다. 대단히 위험하다. 젊은 시절에 현실이 역겨운 사람이면 누구나 니체에 매혹될 수 있다. 10-20대에 니체에 매혹되지 않는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30살이 넘어서도 니체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p.36
그동안에는 박정희는 물론 박종홍도,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도 니체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는 않았기에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니체를 잘 알지 못했고, 이 점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도 어렵게 피와 땀과 눈물로 겨우 얻은 우리의 허약한 민주주의에 니체가 밀어닥치고 있다. 끔찍하게 뒤집히고 오해되고 난해하게 꾸며진 최신판 독일제 니체, 프랑스제 니체가 황사보다 더 무섭게 우리에게 불어 닥치고 있다. 여전히 독일제나 프랑스제라면 사상, 학문, 음악, 미술, 자동차, 포도주를 가리지 않고 사족을 못 쓰는 우리의 허약한 문화적 체질에 니체라는 괴이한 매력의 마약성은 대단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가장하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최신판 니체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니체가 현대사회를 비판한 반자본주의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소수정치학 등의 선구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것은 니체 바이러스에 오염됐던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최소한이나마 유효한 약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pp.51~52
1870년 7월에 보불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을 디오니소스적 분출로 본 니체(이 점에서 니체는 참으로 ‘독창적’이었다!)는 간호병으로라도 참전하려고 자원입대했다. 그는 전선으로 가던 도중에 기병대의 행진을 보게 되자 “가장 강하고 고귀한 삶을 향한 의지는 생존싸움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 즉 전쟁과 지배를 향한 의지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고 감탄한다. 여기서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 또는 ‘힘에의 의지’라는 니체의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과 지배를 위한 의지인 것이다. 니체는 비참한 전장을 “현존재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미화하면서 찬양했고,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아마도 평생 발휘해보지 못했을 놀라운 상상력, 즉 비참한 전장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게 해주는 강인한 군인의 상상력을 갖고 있어야만 비로소 니체를 이해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pp.128~129
니체는 “보다 지체가 높은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왜소한 덕을, 이 잔꾀를, 이 모래알 같은 배려를, 이 개미 떼 같은 잡동사니를, 이 측은한 안일을, 이 ‘절대다수의 행복’이라는 것을 극복하라!” 여기서 극복의 대상으로 지칭된 것은 천민들, 즉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고 주장한다는 이유에서 천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는 지금의 우리도 천민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두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니체가 부정하는 평등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행복’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선언한다. 나는 천민이 아니다. 나는 천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나는 남보다 지체가 높은 인간도 아니고,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남과 평등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남보다 월등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나는 천민이 아니고,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될 필요도 없다. ---p.209
내가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평등을 주장하는 민중(여성을 포함하여)을 천민이니 잡것이니 하며 철저히 무시하고, 불평등을 주장하는 초인을 끝없이 예찬하는 책이며, 그러면서도 초인이라는 게 민중을 무시하는 존재인 것 외에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 니체의 가르침대로 초인이 되고자 마음먹어도 민중을 천민이라고 욕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뾰쪽한 길이 없음을 알게 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등과 민중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자신을 학대하게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소득을 얻을 게 없다. 그런 불필요한 자학을 하게 되려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굳이 읽어야 하는가? ---pp.237~238
니체는 대중이 선과 악의 구분을 통해 강자에 대한 자신들의 원한을 해소하려고 한다고 본다. 그러나 도덕이나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인간의 양면적 본능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중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도덕에의 의지’를 갖는 것이지 그 규준을 설정하는 척도가 정당한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런 노예도덕에 대해 그는 초인의 주인도덕을 제시한다. 니체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 이외의 다른 세상은 없으므로 도덕, 윤리, 가치관은 신이 부여하는 것일 수도 없고, 다른 세계에서 오는 것일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도덕, 윤리, 가치관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에서 이익을 얻는 노예 대중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니체는 주장한다. ---p.323
니체의 관점주의는 종래 철학의 굳어진 관점에 대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고, 특히 최근에 와서는 니체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관점주의는 니체가 창안한 것이라기보다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점주의적으로 보면 관점주의 자체도 하나의 주장이므로 그 주장, 즉 관점주의도 오류일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관점주의는 스스로를 진리라고 주장해야만 옳은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니체 자신의 관점이 계급에 포섭된 것이어서 전혀 관점주의적이지 않고 도리어 반민주주의적이라는 점에 있다. 니체는 모든 문제에 대해 모든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인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p.327
도대체 니체의 무엇이 우리의 사춘기 소년을 비롯한 대중에게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어쩌면 니체가 고통을 긍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고통 속에서 사는 대중이 그를 찾은 것이 아닐까? 니체는 인간에게는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철학자나 종교인들은 인간이 겪는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고통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통만이 아니라 절망, 질병, 냉대, 경멸, 불신, 패배 등도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불운, 질투, 완고함, 잔혹함, 탐욕, 폭력 등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것들을 일부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인간의 미덕이 성장한다고. 그래야 인간은 인간임을 넘어 초인이 된다고.
니체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했기에 철없던 사춘기 시절의 나를 비롯해 대중에게 그가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닐까? ---pp.344~345
독일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시작해 히틀러의 시대를 거쳐 1945년까지는 물론이고 학생운동이 일어난 1968년까지도, 아니 네오나치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까지도 니체가 엄청난 정신적 오염을 초래해왔다. 프랑스에서도 최근의 극우 정치인 장 마리 르팽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우익에 미친 니체의 영향이 컸다. 따라서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오염원인 니체를 철저히 세탁해야만 그나마 정신적 오염이 가셔질 수 있기에 니체를 새로이 해석해서 그가 포스트모더니스트였다느니, 페미니스트였다느니, 건강철학자였다느니 하고 주장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니체 세탁의 필요성이 전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린 학생이나 젊은이들에게 과연 니체를 읽혀야 하는가, 읽히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볼 필요성이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우리에게는 유해할 뿐인 니체를 어린 학생이나 젊은이들에게 읽힐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p.351
사실 현대사회의 가장 비열한 부분인, 아니 그 본질인지도 모르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실을 니체만큼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보여주는 철학을 한 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강자=귀족=지배자=엘리트의 지배를 합리화해주는 것으로 니체의 철학만큼 멋진 것이 있을까? 그러나 니체 자신도 분명히 인식한 대로 약자=평민=피지배자=비엘리트가 다수로 존재한다. 어쩌면 그들도 강자=귀족=지배자=엘리트 이상으로 적자생존의 정글법칙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강자=귀족=지배자=엘리트가 내세우는 동물적 본능의 자연적 질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믿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적 가치와 그런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를 신봉한다.
---p.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