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진철이 형 엄마 왔는데, 누나더러 동네 깡패 새끼래. 누나가 진철이 형 코피 터트렸다면서.”
코피는 나도 났다. 뺨도 맞고 가슴도 걷어차였다. 지금도 그 자리가 욱신욱신 쑤신다. 치사한 자식, 창피한 줄도 모르는 머저리, 맞은 게 뭐 자랑이라고 엄마한테 이를까.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박진철이었다. 일부러 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치마가 올라가는 바람에 아이들이 구멍 난 내 팬티를 보았다. 팬티에 구멍이 난 건 나도 몰랐다. 알았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거다. 떠들썩한 웃음과 놀림을 한 번에 잠재우려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박진철을 흠씬 패 주는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렇게 들킬 줄 알았다면 끝장을 보는 건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 p.11
“저는 서경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노란 원피스 이름이 나랑 같은 경서란다. 반 아이들이 키득대며 나를 흘끔거렸지만, 나는 그 애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 반에 경서가 두 명이기는 하지만, 한 명이 워낙 특별해서 헷갈릴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담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담임은 나를 ‘강경서’나 ‘경서야’라고 부르지 않았다. ‘야!’ 또는 ‘너!’, 그것도 아니면 ‘이 자식!’이나 ‘이 새끼!’라고 부른다. 그러니 헷갈릴 턱이 없다.
“경서는 저기 진철이 옆에 앉아라.”
담임이 ‘경서’라는 이름을 저렇게 상냥하게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았다. --- p.15-16
“참, 아깐 왜 교탁 뒤에서 옷 갈아입었어? 넌 가슴이 작아서 브래지어 안 했잖아. 혹시 한 거야?”
등에 손을 댔을 뿐인데, 경서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피했다. 그러고는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한 듯 무섭게 째려보았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그건 정말 무례한 짓이야. 너처럼 이것저것 참견하는 애는 딱 질색이야!”
경서는 표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획 돌아서서 혼자 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들은 게 정말 경서가 한 말인지, 내가 잘못 들은 건지 헷갈렸다. --- p.69-70
경서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방바닥만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있기도 어색해 방을 나가려고 할 때다. 헐거운 폴라티 사이로 드러난 경서의 뒷덜미가 온통 보랏빛이었다. 문으로 가려던 발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처음에는 속옷인 줄 알았다.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았더니, 전에 팔뚝에서 보았던 것 같은 피멍이었다.
“너 여기 왜 그래?”
지난번보다 멍이 더 짙은 게 손만 갖다 대도 욱신욱신 아플 것 같았다.
“뭐가?”
경서는 당황한 듯 한 손을 뒷덜미에 갖다 댔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나는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 경서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 p.176-177
아줌마 손이 올라갈 때마다 은색 플루트가 반짝거렸다. 웅크린 경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플루트가 몸에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하며 경련을 일으킬 뿐이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아줌마가 플루트를 침대에 던지더니 경서 머리카락을 덥석 움켜잡았다. 힘없이 딸려 일어난 상체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줌마는 사정을 두지 않고 경서 머리를 벽에다 박아 버렸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떨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투둑, 등 뒤에서 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푸른 감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 p.206-207
이호준이 장난을 치다 그만 박진철 남방을 잡아당겼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박진철은 앞가슴을 풀어헤친 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웃어 댔다. 녀석은 부끄러운 듯 서둘러 옷을 바지 안으로 쑤셔 넣었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녀석의 옆구리에 든 푸른 멍을. 지난번 내가 발로 걷어찼을 때 생긴 것 같다. 나는 머릿속이 멍해져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p.211-212
박진철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감긴 눈까풀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고 보니 몸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안에서 신음 같은 흐느낌이 터져 나오며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박진철이 건성으로 잡고 있는 내 손을 뿌리치고 숨을 헐떡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녀석은 당장에라도 달아날 태세로 나와 뒷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고야. 두 번 다시 세강이 놀리지 마. 한 번만 더 내 동생 울리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정말이야!”
나지막이 말하고 돌아서는데 종이 울렸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점심시간이 끝났나 보다. 담임이 곧 들어올 것 같아 일단 자리로 가서 앉았다. 책상 밑에서 마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꾸 눈물이 나려 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먹을 날리지 않아 다행이다. 만약 박진철을 때렸다면 나도 그 아줌마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 p.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