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와 수치심 16세기 이후 사생활에서의 목욕은 중세시대 손님 접대라는 맥락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된다. 욕조에서 손님을 맞는 일 -‘전신욕’중이었건‘반신욕’중이었건- 이 무례로 여겨지지 않았다. 16세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테마 즉, 목욕 중 들이닥친 손님을 맞이하는 귀부인이라는 주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인을 그리기 위한 구실이기도 했지만, 18세기까지 상류층 여성이 목욕 중에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치심과 옷 “옷은 우리를 나체의 부끄러움에서 엄호해 주고, 추위나 더위 등 악천후로부터 몸을 보호해 준다.”1601년, 벨기에의 신부 장 드 글렌은 수 세기 동안 논쟁거리가 될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옷이 먼저냐 아니면 수치심이 먼저냐는 문제다. 종교계의 모럴리스트들은 원죄를 저지른 후 아담이 느낀 수치감을 원용하면서 수치심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나체주의 지지자들은 의복이 수치 감정을 만들었다고 반박하며, 선교사들이 강요한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원주민들은 이전의 나체 상태에 대한 수치심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의학적 수치심 “자연에 관한 일에 부끄러운 것은 없다." 수치심의 역사에서 의학적 수치심이라는 항목을 삭제하는 데에는 의학계의 오래된 이 격언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의사 앞에서 사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이런 원칙이 때로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 수 있다.
침대에서의 수치심 중세를 산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공간은 대개 한 칸으로 만들어진데다, 그나마 대형 공동침대가 그 절반을 차지했으므로 사생활이나 수치심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17세기에 수치심의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 향했으니,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같은 계급의 사람끼리는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에서 방금 빠져 나온 듯 알몸의 아름다운 여인을 불시에 목격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라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런 상태로 남자가 목격되는 경우에는? 예상밖의 수줍음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친구들의 조롱을 받았다.
알몸 행진 나체는 그것이 우연히 보였는지, 의도적으로 보였는지, 얼핏 보였는지, 전시되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자들 앞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당당하게 몸을 노출했던 17세기의 남자들이 속옷차림으로 태형을 당할 때 그들의 얼굴을 붉히게 했던 그 이상한 수치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의식되지 않을 경우 나체는 신화적 무구함 -황금시대, 에덴동산, 나체주의의 천국- 을 획득하며 그런 상태를‘수치심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경우, 나체는‘파렴치함’을 표현하며 그것은 민법, 도덕 그리고 종교당국의 제재를 받는다. 강제로 나체로 만드는 것은 최악의 능욕이었으며, 그것은 과거의 당국자들이 자주 사용한 불명예스러운 징계였다.
변기 의자에서의 대화 변소에서의 수치심이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은 16세기부터다. 그때부터 변소들이 점차 성채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겉모습과 치장에 현혹된 문명, 완벽한 건축적 공간 구성을 위해 육체의 생리적 욕구를 부정하는 문명에서 변소의 철폐는 증후적인 것이었다. 엄격한 대칭 원리 -질서정연한 문명 자체를 석조건물을 통해 상징화하는- 에 따라 설계된 저택 어느 곳에‘사실(私室)’을 둔다는 말인가? 그런 연유로 궁궐에서 연회가 열릴 때면 연회장의 벽난로, 문 뒤, 벽지, 발코니 등 아무데나 대소변을 내갈기곤 했으니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궁정의 포석 하나하나에, 계단 하나하나에 똥덩어리가 묻어 있는 셈이다.
벌거숭이 임금님 수치심이 예법서에 등장하자 자기 행동을 뒤돌아보는 습관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졌다. 14세기에서 17세기의 예법서의 규정들이 상류계층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고위층들은 예절 규칙을 정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면제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감히 왕에게 수치심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관습이 굳어지면 허용 범위에 있던 것들은 의무사항이 된다. 왕에게는 수치심이 금지된 것이다.
조형예술과 수치심 17세기는‘수치심이 요구하는 가필’을 발명해낸 시대다. 다니엘라 다 볼테라가 수정했던 〈최후의 심판〉을 모범 삼아 은밀한 옷주름을 만들어내어 16세기 작품들에 덧칠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오를리의 〈성 가족〉에 그려진 어린 예수의 성기는 푸르스름한 베일로 가뼉지고, 이렇게 덧칠한 부분은 1980년에 와서야 원상태로 복원된다. 조각 작품에서‘수정’은 단순히 거세 혹은 수집가와 미술관 관리자들을 괴롭히게 될 포도잎사귀 덧붙이기를 의미하는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기저귀를 입힌’바오로 4세는 조각상에 석고나 청동을 덧붙이게 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아이디어는 반종교개혁의 취향이지만, 동시에 수치심과 고대 미술품을 동시에 보전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연극과 영화 : 누드 전쟁 우리 할아버지 세대를 격분하게 만들었던 사건들을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어이없어 할 것이다. 예를 들면 1912년 검열규제법이 화면에서의 키스 시간을 제한함에 따라 경찰관이 손에 스톱워치를 들고 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는 광경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전후 미국 영화에서는 배꼽을 보이는 것이 가장 심한 외설이었기 때문에 여배우들은 배꼽은 보석으로 가리면서도 젖가슴은 거리낌없이 노출시켰다. 1965년까지 할리우드에서 통용되었던 헤이스 규정은 털과의 전쟁으로 시작했으며, 따라서 50년대의 플레이보이들은 셔츠를 벗기 위해서는 가슴팍의 털을 면도해야만 했다.
말에 대한 두려움 모든 학교 도서관 한편에는 금서보관소가 있었는데, 특히 가톨릭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 책들을 이곳에 보관했다. 16세기에는 어느 나라나 금서로 정해진 책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금서목록은 교황청의 것으로, 1559년에 작성이 시작되어 1571년에 완성되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가장 외설적인 저작으로 간주되었던 라퐁텐의 『우화집』이나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나란히 몽테뉴의 『수상록』, 발자크, 뒤마, 플로베르, 상드의 작품들이 있었고, 심지어 위고와 라마르틴의 몇몇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순의 절정은 1745년 3월 22일 바티칸당국이 금서목록에 바로 성경을 포함시킨 일이다.
벌거벗은 신(神) 벗은 그리스도는 복잡한 체계에 속하는데,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벗은 아담/벗은 몸을 가리는 아담은 세례/십자가 처형에 상응한다.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리스도는 원죄 이전의 아담과 같다. 그는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아담을 묘사한 그림에서처럼 성기에 대한 암시는 원초적인 순결을 암시한다. 신의 어린 양이 스스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는 나신의 순결함을 상실한다. 무화과 잎사귀를 따서 자신의 성기를 가리는 아담처럼 구세주는 옷을 몸에 두른다. 그것은 중세적 사고에 의하면 치욕스러운 나신의 의식을 조금도 지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십자가형은 이중적 대립에 포함된다. 즉, 한쪽에는 아담/구세주, 다른 한쪽에는 세례의 순결/죄의 수용이 있다.
광고에서의 수치심 지나치게 대담하다고 생각되는 광고 포스터에 대한 반응을 통해 대중의 수치심이 확인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역의 통로는 호사가에게 끊임없이 새롭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과장된 누드가 가차없이 제재를 받는 곳도, 또 광고의 효과를 가장 잘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장소도 그곳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수치심연합은 젖꼭지와 하얀 반바지에 나비를 붙이며, 때로 광고는 찢겨나가거나 냉소적인 혹은 지극히 공격적인 낙서 세례를 받는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