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자 생활의 시작
“내일이 동지 보름이니, 이왕 삭발하는 김에 좋은 날 삭발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이만일천 배를 마치자 원주스님이 삭발 날짜를 잡았다. 백련암에서는 성철스님의 뜻에 따라 삭발과 관련된 모든 염불 의식을 없앴다. 대야에 물을 떠놓고 원주스님이 직접 가위를 들고 긴 머리카락을 대강 자른 다음 바리캉으로 밀었다. 마지막엔 면도로 한 올의 머리카락까지 깨끗이 걷어냈다. 삭발이 끝난 뒤 원주스님이 머리카락을 싼 종이를 내밀었다.
“이 긴 머리카락은 속세와 절연하는 상징이니 행자가 태우든지 말든지 하이소.”
혹자는 눈물이 솟는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저 담담했다.
“제 몸을 떠났으면 그만이지요. 제가 또 어디에 버리겠습니꺼? 원주스님이 다른 행자들에게 하는 대로 하시지요.”
머리를 감느라 맨머리를 만지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딱딱하고 까슬까슬한 촉감이 느껴졌다. ‘나도 이제 스님이 되기는 되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삭발을 함으로써 얻은 ‘행자’라는 이름은 ‘출가를 결심하고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예비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큰절로 내려가 법문을 하고 올라오던 성철스님이 내 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방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삼배를 하고 꿇어앉았다. 큰스님의 표정이 출가를 권하던 당시의 자상함으로 바뀌었다.
“니도 이제 중 됐네. 그런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 된 것 아니제. 거기에 맞게 살아야제. 중은 평생 정진하다가 논두렁 베고 죽을 각오를 해야 된다 아이가. 중노릇이 쉬운 거는 아이다, 알겄제.”
방금 삭발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법문을 해주시니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대답만 “예.” 했을 뿐, 시종 ‘내가 진짜 중이 되기는 된 것인가’ 하는 의아함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절한다꼬 수고 많았다. 며칠 쉬거라.”
물러 나와 큰스님의 말씀을 원주스님께 전했다. 원주스님은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뒷방을 하나 배정받아 며칠 동안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냈다. 밥 먹고 누우면 바로 잠이 들었다. 이만일천 배의 피로와 긴장이 한 올씩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스님들 생활이 이렇게 편하고 좋은 것이구나’ 하며 온몸이 풀어져 있을 때 원주스님이 우물가로 불렀다.
“지금 절에 공양주(밥하는 사람)가 없으니 이제 행자가 공양주 소임을 맡아 주어야겠소.”
행자로 받은 첫 소임은 부엌일이었다. 원주스님이 조리와 쌀 한 되를 내주면서 저녁 공양을 위해 쌀을 씻어보라고 했다. 나는 한순간 당황했다. 이런 일을 하려고 출가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원주스님, 지금까지 내 손으로 밥해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더. 밥하려고 절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밥할 사람이 없으면 식모를 한 사람 두면 되지 않습니꺼?”
이번에는 원주스님이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큰스님께서 불교를 좀 아는 놈이 온 것 같다고 하시기에 잘 봐주려고 했더니만, 절 살림에 대해서는 영 깡통이구만. 큰스님께서 일절 부엌에 여자를 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식모를 두겠소. 이렇게 똑똑한 행자가 다 있네.”
원주스님은 이상한 놈이라며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히 이상한 행자였다. 그렇지만 당시는 정말 막막했다.
지금이야 전기밥솥에 쌀과 물만 넣으면 밥이 되지만 당시에는 조리로 쌀을 일어 돌을 가려내고, 무쇠솥에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지어야 했다. 큰 바가지에 쌀을 붓고 물로 몇 번 헹궜다. 이어 조리질을 한다고 했는데 쌀이 어디로 도망가는지 빈 조리만 헛바퀴를 돌았다.
“니 지금 뭐 하노?”
성철스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저녁밥을 짓기 위해 할 줄 모르는 조리질을 하느라 샘가에서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반가운 마음에 불평 겸 하소연을 했다.
“원주스님이 갑자기 불러내더니만, 오늘 저녁부터 공양주 노릇을 하라고 해서 지금 조리질하고 있심더.”
큰스님에 대한 예의는 갖추었지만 목소리엔 불만이 잔뜩 담겨 있었다. 큰스님은 새까만 행자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하하, 이놈아, 니도 묵고 노는 것이 중인 줄 알았제. 그게 아이고, 혼자 사는 게 중인 기라. 밥할 줄 모르고, 반찬 할 줄 모르고, 빨래할 줄도 모르면 우째 혼자 살겠노. 혼자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밥하고 반찬 하는 것은 지가 할 줄 알아야제. 그래서 공양주 시키는 것인데 알지도 못하고 불만만 해, 이 나쁜 놈아!”
웃음으로 시작된 말씀은 호통으로 끝났다. 출가하기만 하면 방 주고, 밥 주고, 옷 주고, 그래서 자기 시간만 가지는 편안한 것이 중 생활인 줄 알았는데……. 당시엔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때때로 ‘아무것도 모르고 절에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절 살림살이를 시시콜콜 알았다면 출가를 결심할 수 있었을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한다.(뒷날 출가할 분들에겐 정말 죄송한 말이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출가를 했다. 오로지 도를 얻겠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대구에서만 살아 산중의 생활방식이 전혀 몸에 맞지 않았다. 도끼질을 할 줄 아나, 낫질을 할 줄 아나, 지게를 질 줄을 아나, 모든 것이 서툴 뿐이었다.
그럭저럭 공양주 생활을 익혀가던 어느 날 원주스님이 키를 가지고 왔다. 키질을 해서 쌀에 섞인 지푸라기와 잡동사니를 바람에 털어내고 잔돌을 가려내는 것은 확실히 조리질보다 어려운 기술이었다. 원주스님의 솜씨는 대단했다. 키에다 쌀을 붓고 휙 쳐올리면 쌀이 1m쯤 높이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순식간에 지푸라기 같은 가벼운 이물질들이 바람을 타고 다 달아나 버린다.
그러나 나는 10cm도 채 쳐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키질을 잘못하는 바람에 쌀이 밖으로 떨어져 키 안에 있는 쌀보다 마당에 쏟아진 쌀이 더 많았다. 그날도 키질을 엉성하게 하다가 또 쌀을 마당에 쏟았다. 큰스님이 어느새 나타나 쌀을 급히 주워 담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니도 어지간히 재주 없는 놈인갑다. 다른 행자들은 얼른얼른 배우는데, 니는 지금 보름이 지나도 우째 그 모양이고. 허 참…….”
큰스님이 혀를 차며 방으로 들어가시는데 몸 둘 바를 몰랐다. 큰스님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켜보고 계셨는가 보았다. “저놈이 제대로 산중 생활에 적응이나 할는지…….”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은 바로 큰스님 뵙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백련암에 살게 되면 언제라도 큰스님을 만나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수시로 여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행자에게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어쩌다 마당에서 큰스님을 뵈면 간단히 몇 말씀 여쭤볼 수는 있다. 그러나 따로 큰스님을 뵈려면 우선 시자스님을 거쳐야 한다. 시자스님은 왜 스님을 뵈려 하느냐, 무엇을 여쭈려 하느냐, 무슨 급한 일이냐 등등 캐묻게 마련이다. 그때 딱히 ‘이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대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살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큰스님을 찾아와 요긴하게 문답을 주고받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스님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행자 생활은 그렇게 힘든 삶이었다.
행자 생활에서 가장 답답했던 점은 말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행자가 공경해야 할 스님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걸 수도 없고, 스님들 또한 행자라는 존재에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아예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처음 절 생활을 하는 입장에선 모든 게 엄청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 입장에서 가장 얘기를 건네기 쉬운 상대는 나보다 몇 달 먼저 입산한 채공菜供(스님들이 먹을 반찬을 만드는 직책) 행자였다. 출가의 계기를 만들어준 친구 스님도 있었지만 그는 스님이고 나는 행자였다. 친구 스님 역시 나를 불러 위로도 해주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줄 만도 한데 안면몰수하다시피 냉담했다.
채공은 행자 중에서도 바쁜 소임이다. 반찬을 보통 서너 가지는 해야 하기 때문에 식사 준비 시간이 되면 칼질하랴, 불 때랴, 나물 볶으랴 매우 바삐 움직였다. 그렇지만 염치 불구하고 나는 끼니때마다 채공에게 쌓였던 질문을 퍼부어댔다. 하루는 채소를 다듬던 채공 행자가 부엌칼을 도마 위에 콱 꽂으며 나지막이 외쳤다.
“한번만 더 물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후로 나는 채공 행자에게도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성철스님의 환갑은 나를 무척 답답하게 만들었던 일로 기억된다. 나이 지긋한 여성 신도 한 분이 멀리서 찾아와 성철스님을 뵙고 간 날 저녁이었다. 원주스님이 테플론 섬유로 만든 옷 한 벌씩을 모든 스님에게 나누어주었다. 광목으로 만들어 여기저기 기운 옷을 받아 입고 살면서 ‘절에선 모두 이런 옷만 입고 사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양복감으로 된 새 옷을 나누어주니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원주스님에게 “왜 이런 새 옷을 주십니꺼?” 하고 물었다. 그런데 나를 더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원주스님의 대답이었다.
“옷을 주기는 줬지만 앞으로 절대 입지 마시오.”
옷을 주면서 입지 말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다시 캐물으니 원주스님은 귀찮아하는 눈치이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그 행자 참 질기구만. 내일이 큰스님 환갑이라, 스님들 입으라고 신도님이 옷을 해가지고 와서 나누어준 것이오. 그렇지만 내일 그 새 옷을 입고 나가면 큰스님께서 절 밖으로 쫓아낼 터이니, 내가 입으라고 할 때까지 절대 입지 말란 말이오. 알겠소?”
원주스님은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내일이 큰스님 환갑이라면 잔칫상을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밤이 늦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 할 텐데……. 그런데 여태 환갑잔치를 준비하는 낌새조차 없는 걸 보니 내일 신도들이 한상 잘 장만해 오는가 보다.’
다음날 아침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점심 때 신도들이 잔칫상을 만들어 오려나’ 하는 생각에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점심도 저녁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렇게 성철스님의 환갑은 지나가 버렸다. 큰스님이라서 굉장한 환갑잔치가 벌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평일보다 더 조용하고, 또 뭔가 조용조용 긴장하며 지내는 모습이 잔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철스님의 생신은 음력 2월 19일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성철스님은 출가 이후 한번도 생일상을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1950년대 말 큰스님이 대구 팔공산 성전암에 머물 당시 일화가 유명하다. 몇몇 신도가 큰스님 생일을 맞아 과일 등 먹을거리를 한 짐 지고 성전암을 찾았다가 쫓겨났다 한다.
성철스님은 누가 생일 얘기라도 하면 “중이 무신 생일이 있노.”라며 꾸짖곤 하셨다. 생일이란 속세의 일, 출가한 승려에겐 이미 끊어진 인연이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육신을 받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날이 생일이 아니라 출가했으니 ‘마음을 깨치는 날’이 생일이라고 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