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로 일하던 20대 중반의 치아키에게 재혼해 따로 살고 있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옛날 포플러 장에 함께 살던 사사키 씨 기억나지? 그 사사키 씨한테 연락이 왔는데‥‥‥.”
어머니의 얘기를 듣던 소설 속 화자 치아키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직감한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엄마와 함께 세 들어 살던 집 ‘포플러 장’의 주인이었다. 생각해보니 치아키가 포플러 장을 떠난 지도 18년이 흘렀다.
판사였던 아버지는 치아키가 여섯 살 나던 어느 봄날 아침 출근을 한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아버지의 얼굴은 예상 외로 깨끗했다. 그 아버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할 수 없다는 것도, 서재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도 치아키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마치 실신하듯 며칠을 내리 잠 속에서 헤매던 어머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치아키의 손을 잡고 전차를 타기 시작했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그렇게 전차에 몸을 실었던 어머니와 치아키는 어느 날 강을 건너 한 역에 내린다. 그리고 그날 강둑을 따라 난 길을 걷다가 커다란 포플러가 있는 집을 발견한다. ‘코포 포플러(포플러 장)’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임대주택 앞에 서서 어머니는 곧바로 이사를 결심한다. 포플러 장에는 치아키네 가족 말고 세 명이 더 살고 있었다. 택시기사를 하는 중년의 니시오카 씨, 봉제공장에 다니는 독신녀 사사키 씨 그리고 어린 치아키의 눈에는 살아 있는 마귀처럼 보였던 포플러 장의 주인할머니.
집에서 살림만 했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결혼식장에 취직을 했다. 치아키는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전학을 했고 어머니가 없는 빈 집을 혼자 지키는 오후가 계속되었다. 어린 치아키는 갑작스레 변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뚜껑이 열린 맨홀로 빨려 들어가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여름이 채 가기 전 병이 나고 말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가도 아이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출근을 해야만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 일층 주인할머니가 치아키를 간호하겠다고 나섰다. 치아키는 두려웠다. 마치 귀신이 나올 것처럼 어두컴컴한 할머니 집에 내려가 긴긴 하루를 버텨야 하다니‥‥‥.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출근하는 어머니가 손에 들려주는 주먹밥 두 개를 들고 치아키는 아침마다 할머니의 거실로 들어갔다.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할머니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던 치아키는 어느 날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 자신이 죽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전령사라는 것이다.
많이 외로웠던 치아키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우기 시작한다.
‘아빠, 안녕하세요. 난 잘 지내요. 안녕히 계세요.’ 처음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점차 치아키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마귀처럼 무서웠던 할머니와 티격태격 싸우며 정이 들어간다. 할머니의 집 거실에서 바라보던 포플러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잎을 떨구기 시작하면서 낙엽을 쓸어모아 태우는 작업은 할머니와 치아키의 일과가 되었다.
“할머니, 쓸어도 쓸어도 매일 떨어지는 포플러 잎들을 왜 자꾸 태우는 거야?”
“먼저 낙엽부터 쓸어.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이웃에게 폐가 되잖아.”
“흥, 할머니는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야.”
어른들 말로는 처녀 시절 가정이 있는 대학 교수와 사랑에 빠져 이곳까지 도망쳐왔다는 할머니. 가족과의 인연을 끊어도 좋을 만큼 사랑했다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씩씩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갔다.
그때 그 포플러 장에서 할머니를 만난 여섯 살의 치아키는 아버지를 잃은 막막한 슬픔을 편지 속에 담아 보내며 마음에 드리워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그곳을 떠난 지 18년 만에 다시 포플러 장을 찾아가는 치아키.
할머니가 저 세상으로 보낼 편지 이야기를 해준 것도 이런 가을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섯 살 난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심어주는 너무도 할머니다운 방법이었다. 치아키가 그 불안한 날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잠들지 못하던 밤에 걸려왔던 무언의 전화를 아버지가 건 전화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도 편지를 쓴 덕분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는 꽤 양이 많을 편지들을 모두 소중하게 보관해주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치아키는 또 다른 고통 속에서 힘겨웠다. 많이 좋아했던 남자, 말수가 적어 치아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남자는 그녀가 유산을 하자 간단하게 이별을 통고했다.
“결혼이란 말은 없었던 걸로 해. 모든 게 하늘의 뜻인가봐.”
치아키가 다니던 병원에 사표를 내고 다량의 수면제를 사들인 것은 그 직후부터였다. 많이 변한 주변의 풍경을 뒤로 하며 생각에 잠겨 포플러 장으로 발길을 돌리던 치아키의 가슴이 일순 턱 막혔다.
문득 얼굴을 들어올리자, 포플러는 지금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황금색 이파리를 사사삭 울리면서.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꿈도 속임수도 아닌, 너무도 선명한 현실 그 자체였기에, 나는 일순, 머리 속이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포플러는 갈 곳 따위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지금 서 있는 곳에 그냥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도 지금 여기에 있다. ―본문 중에서
남겨진 가족도 친척도 없다던 할머니의 장례식에는 그녀보다 앞서 엄청난 사람들이 와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할머니가 자신들의 삶에 개입했던 사연과 그것이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회상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치이키한테만 편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편안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 많은 사람들. 할머니는 이들 하나하나의 슬픔을 들여다보았고 그들에게 말을 던졌다. 길가에서, 안과 대기실에서, 전차 안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공원 벤치에서, 백화점 옥상에서, 다리 위에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멍하니 있는 사람에게,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사람에게, 불안으로 표정을 잃은 사람에게, 겁먹은 사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