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비행기조종사인 주인공 ‘나’는 비행기 고장으로 낯선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행성 B612호를 떠나 지구에 방문한 어린왕자를 만나 뜻밖의 우정을 나누게 된다. 오늘날까지 전 세계 독자들에게 꾸준한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는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된 곳은 바로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이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고 광대한 사막인 만큼, 풀 한 포기 쉽게 나지 않는 불모의 땅. 하지만 동시에 그 불모의 이미지가 인간 내면의 고독을 마주하게 하고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낭만의 장소이기도 하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지중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으로는 홍해와 접해 있다. 아프리카 대륙 면적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해마다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특히 사하라 사막의 남단, 동서에 띠 모양으로 펼쳐지는 사헬 지역의 사막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1968년부터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사헬은 불과 5년 만에 한반도의 두 배에 가까운 면적이 점차 사막화되었다고 한다.
‘사하라’라는 말은 ‘불모지’를 뜻하는 아랍어 ‘Sahra’에서 유래되었다. 지역의 대부분이 모래와 암석으로 뒤덮여 있으며, 낮과 밤의 기온차가 30℃를 넘는 기후 조건이 암석을 빠르게 붕괴시켜 사막의 모래를 만들어낸다. 비록 대부분은 척박한 땅이지만 사하라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약 2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이들은, 사하라 북단의 아틀라스 산맥, 지중해 인접 지역, 나일 강 유역 등에 주로 거주한다.
사하라 사막도 한때는 강이 흐르고 다양한 동식물이 살던 비옥한 곳이었지만, 급격한 기온의 변화가 이곳을 사막으로 만들었다. 사하라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에 그려져 있는 기린, 코뿔소, 영양들과 들판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곳이 과거에는 풍요의 땅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지금까지도 이 지역의 암벽에서는 수만 점의 부조와 그림들이 발견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메마른 불모지가 되어버린 사하라 사막이 아프리카 문화의 요람이며 아프리카 역사가 태동한 곳이었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의 메마른 심장인 셈이다. --- p.32
인구 약 5천만 명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민족?문화?언어?신앙 등이 각기 다른 다양성의 나라다. 우선 남아공은 다민족 국가다. 코사족, 줄루족 등 흑인이 79퍼센트, 이어 백인이 9.6퍼센트, 혼혈이 8.9퍼센트, 아시아계(인도인 등)가 2.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데, 다인종?다민족이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모두 빛나라는 염원에서 ‘무지개 나라’라고 칭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공용어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뿐이었다. 백색이 아닌 유색인종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려면 영어는 필수였다. 흑인들 사이에서는 자국어보다 영어구사 능력에 가치를 두는 경향이 강했다(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다).
가장 많은 24퍼센트가 줄루어를 사용하고 그 다음으로는 약 18퍼센트가 코사어를 쓴다. 세 번째인 아프리칸스어는 13퍼센트, 그리고 영어는 8퍼센트이다.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의 모국어로, 네덜란드어에 각종 흑인언어, 인도유럽어족, 말레이시아어 등을 합친 일종의 혼합어다. 이 밖에 소토어, 은데벨레어 등 지방언어를 포함한 11개 언어가 남아공의 공용어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나 상거래에서는 압도적으로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 국가도 다섯 개 언어로 부른다. 먼저 코사어와 줄루어로 시작해서, 소토어와 아프리칸스어로 각각 한두 소절씩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어로 끝난다. 곡조도 백인 정권 시대의 국가 ‘남아공의 소리’와 한때 흑인 해방가로 불렸던 ‘신이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를 하나로 편곡했을 정도로 신경을 써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p.40
라이베리아는 1847년 미국에서 이주한 소수의 흑인 해방노예가 건국한 특이한 역사를 가진 나라로, ‘미국식민협회’가 추진한 사업의 결실이다. 국명이 ‘리버티(liberty, 자유)’에서 유래한,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이다.
여기까지만 듣고 보면 미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이 이루어진 것은 이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863년이었다. 사실 라이베리아 건국은 노예의 주인들이 인종격리와 아프리카 식민지 이주를 위해 기획한 사업이라는 것이 그 진상이다.
라이베리아의 수도는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인 먼로를 따서 먼로비아라고 명명했다. 공화당 소속이었던 먼로는 준주(準州)였던 미주리까지 노예주 승격을 인정하는 미주리 협정을 수용한 당사자였다. 노예 해방 지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이다. 라이베리아로 이주한 해방노예들은 ‘아메리코 라이베리안’을 자칭하며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원주민을 박해하면서 그들을 반노예처럼 혹사시켰다. 1930년대에는 부통령까지 연루되어, 노예무역과 원주민의 노동력까지 수출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흑인 노예들이 세운 나라가 다시 흑인을 노예로 부린 비극의 악순환이었다. --- p.59
‘관용과 인권의 나라’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적 혈통을 기준으로 국민을 정의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말하고, 공화국 시민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면, 이민자의 아들이든 누구든 공화국 시민이 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는 이베리아 반도와 알제리 등에서 대량의 이민자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독립전쟁
(1954~1962년)으로 황폐해진 조국을 떠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려고 구 종주국 프랑스로 이민하는 알제리 사람들이 급증한 것이다. 마침 프랑스는 노동력 부족으로 고민하던 때였으므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들은 자동차공장 같은 곳에서 값싼 노동자로 일하며,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린 1975년까지 프랑스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기여해왔다. 현재, 프랑스에는 50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과 그 자손이 살고 있다. 이민자 중 알제리를 중심으로 하는 마그레브 국가 출신이 3분의 1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세계화라기보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상흔’이다.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은 이제 프랑스 인구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며, 사회문화 면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소설 《이방인》으로 널리 알려진 알베르 까뮈도 비록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으며 세계적인 축구스타 지단도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이다. 지단은 때로 경기에서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p.106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단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후 치러진 남아공의 1948년 총선에서 국민당(NP)의 기본정책으로 처음 등장했다. 선거 공약으로 ‘인종차별정책’을 들고 나왔다는 말인데 이런 공약이 가능했다는 것이 오늘날로서는 믿기지 않는다. 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국민당은 공약대로 ‘분리 발전 정책’을 추진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종족은 그들 지역 고유의 문화를 소중히 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정책이다. ‘고유문화의 존중’이라고 하면 듣기야 그럴듯하지만, 말하자면 비(非)백인을 법적으로 배제시키고 백인 지배의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 목적이다. 다른 인종과의 결혼을 금지한 ‘인종 간 결혼금지법’, 다른 인종과의 성행위를 금지한 ‘부도덕 행위 금지법’, 인종별 거주지를 정한 ‘집단지역법’, 비백인에게 신분증을 의무화시켜 이동을 규제한 ‘패스로즈(Pass laws)’ 등 잇달아 인종 격리 관련법을 제정해나갔다. 1953년에는 ‘격리시설 보유법’을 제정하여, 기차·역·공원 등 공공시설도 백인과 비백인으로 철저하게 구분하여 이용하게 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도 볼 수 있었지만, 이로써 ‘WHITE ONLY’라는 표시가 법률의 보증을 받은 셈이었다.
남아공은 왜 인종격리정책을 강화한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줄줄이 독립했기 때문이다. 아시아 민족주의의 파도가 아프리카로 파급되는 것을 정부는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반투(Bantu) 자치촉진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각 종족별로 그들을 홈랜드라는 불모의 10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아무런 산업도 없는불모의 땅에서 자치권은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흑인들은 법적으로는 남아공 국적이 없는 셈이었고, 남아공 정부는 그들을 이주노동자
로 받아들여 저임금 노동과 교육의 기회를 빼앗은 것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 p.141
다이아몬드 산업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롭다. 최초로 다이아몬드를 발굴한 인도는 오랫동안 세계 유일의 산지였다. 18세기에 이르러 드디어 브라질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지만 바로 고갈되어 버리고,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1867년 남아프리카 킴벌리에서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상(鑛床)이 발견된다. 게다가 주변에서 불트폰테인, 프리미어 등 거대광산(?山)도 발견되었다. 새로운 다이아몬드 산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시장을 독점한 것은 영국 출신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다. 세실 로즈는 영국 정부가 추진한 아프리카 종단 정책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제국주의자다. 1870년 남아프리카에 이주하여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 채굴에 종사하였고, 로디지아의 개발을 위해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설립의
특허를 받았다. ‘로디지아’란 세실 로즈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로즈의 나라’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잠비아, 말라위, 짐바브웨를 모두 합친 거대한 땅이었다. 세실 로즈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자신만의 왕국, ‘로즈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다이아몬드 광산 독점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1888년 세실 로즈는 킴벌리 일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대부분 사들여 ‘드비어스 연합 광산회사(DE BEERS Consolidated Mines)’를 설립했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다. --- p.150
중국은 상당한 자원 보유국이다. 특히 석탄·철광석의 산출량은 세계적 수준이며, 내륙에도 다칭 유전을 비롯해서 대규모 유전을 보유한 오랜 석유 수출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성장에 따른 수요를 국내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1994년부터 석유 수입국으로 돌아섰다. 주변에 대량의 석유와 천연가스 유전이 매장되어 있는 남중국해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일본과의 영토 문제가 과열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아프리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서브사하라 지역에서 나이지리아 다음으로 석유매장량을 자랑하는 나라가 바로 앙골라다. 중국은 2002년, 27년간의 내전이 막 종결된 이 나라에 손을 내밀었고, 2004년 인도와의 경쟁에서 이겨 마침내 앙골라로부터 석유 구입권을 얻었다. 앙골라에 20억 달러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하루 1만 배럴의 석유 채굴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인프라 정비 등 앙골라 부흥 지원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 유대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 p.165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마사이족은 아직도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목생활이 아니라 가축을 기르는 이들은 유독 소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갖고 있는 소의 수로 가정의 부를 가늠한다. 또한 농사를 전혀 짓지 않아 곡물 섭취를 거의 하지 않는 이들은 오로지 소에서 나오는 우유, 고기만을 섭취하며 때로 소의 피를 받아 마신다. 서구의 몇몇 인류학자와 영양학자들은 고기류만을 섭취하는 마사이족이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지 않고 매우 건강하게 지내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마사이 다이어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일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목축업을 하면서 하루에 걷는 양이 현대인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이 이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이유였다.
한때 마사이는 동아프리카 지역의 너른 땅을 차지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전염병과 분쟁으로 차츰 세력이 약화되었다. 케냐(몸바사 시)와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를 놓기로 계획한 영국은 이 틈을 타서 마사이의 수장과 계약을 맺고, 철도가 통과하는 마사이 땅을 헐값에 손에 넣는다. 마사이족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백인들에 의해 마사이족의 거주지는 좁혀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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