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정확히는 서기 6년 음력 2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남장을 한 60대 여인이 범같이 날쌔고 곰같이 억센 다섯 명의 장수를 이끌고 미추홀을 떠나 들판을 가로질러 이 위례산 밑에 다다랐다. 그들은 골짜기 들머리의 경계초소를 번개처럼 기습하여 순식간에 초병들을 해치우고 어두운 산길을 마치 평지를 가듯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여섯 명의 정체는 국모 소서노와 그녀가 이끄는 다섯 명의 특공 결사대였다.
“절대로 내 아들 온조를 해쳐서는 안 되느니라! 잘 알고 있겠지?”
“명심하고 있나이다, 국모님!”
소서노가 다섯 명의 장수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고 장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마침내 성 밑에 다다른 소수 정예의 특공 결사대는 성벽을 타넘어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소서노의 지휘에 따라 온조의 심복들을 찾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좁은 성안은 이내 비명과 절규, 경고의 외침과 신음이 울려퍼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머리와 팔 다리가 떨어지고 살이 갈라질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소서노 일행은 무서운 투지로 맹공을 퍼부었지만 역시 중과부적 역부족이었다. 예상보다도 위례성의 위기대처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서노의 기습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어둠 속의 난전이 끝났을 때 여섯 명의 결사대는 모두 어육이 되어버렸다.
“횃불을 가져오라! 빨리 불을 밝혀라!”
온조왕이 소리쳤다. 불을 밝힌 뒤 침입자들의 시체를 살펴보던 온조는 그만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이럴 수가! 복면을 하나하나 벗겨보니 그 가운데 남장을 한 채 죽은 자신의 어머니 소서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이 비극적 운명의 여인 소서노의 최후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의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은 국모를 시해한 이 참극을 은폐한 기록이라는 것이 김성호 씨 등의 주장이다.
‘왕도에서 늙은 여자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사망했다(春二月 王都老쯢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비극의 해 서기 6년인 온조왕 13년이란 실은 비류왕의 재위 연대인 동시에 온조가 분립한 첫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듯하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온조왕 13년은 곧 소서노 여왕의 치세 마지막 해요, 그 이듬해가 온조왕의 원년이라고 주장했다.
--- pp.82-84, 「소서노ㆍ고구려 건국의 조력자, 백제의 국모」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그것은 개백현에 새로 부임한 성주가 한주의 미모가 매우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혼인을 강요해온 것이었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성주, 그것도 강적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변방의 수령을 맡아 군사와 행정 양면에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성주인지라 백제 왕실과 조정에서도 알아주는 거물이었을 것인데 그의 이름은 전해오지 않는다. 또한 그가 총각이어서 청혼을 한 것인지, 아니면 유부남인데도 여색을 밝혔기에 한주를 첩으로 달라고 강요한 것인지도 지금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런 것은 어쨌든 간에 적국인 고구려 사내, 그것도 고구려의 태자와 혼인을 약속하고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한주가 어찌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속 시원히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밀을 알 턱이 없는 부모까지 나서서 성주의 편을 들며 혼인을 강권하니 한주의 가슴은 그저 미칠 것만 같았다.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며 궁리하던 끝에 한주는 마침내 이렇게 둘러대며 딱 거절을 했다.
“소녀에게는 이미 마음속으로 정혼한 남정네가 있사옵니다. 지금 수자리에 나갔는데, 돌아오면 그에게 시집가려 하오니 그런 말씀은 이제 그만하소서!”
이런 말을 들은 부모는 깜짝 놀랐고, 또 그 말을 전해들은 성주는 불같이 노했다. 한사코 버티는 한주를 관가로 잡아들인 성주가 마치 ‘춘향전’에서 변학도가 성춘향에게 하듯이 이렇게 위협했다.
“네 이년! 이 자리에서 바른대로 불거라! 네가 이미 부모도 몰래 몸과 마음을 바치고 사통을 했다는 사내가 누구란 말이냐? 누군지 밝히지 못하는 걸 보니 혹시 적국의 첩자가 아니더냐? 네가 정녕 그처럼 나라를 배반코자 한다면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한주가 죽을 때 죽더라도 사랑하는 이에게 한번 바친 정절은 기필코 지키리라 작정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성주님께 아뢰옵니다. 소녀는 이미 정혼한 남정네가 있사옵기에 성주님의 지엄하신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옛말에도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사내를 받들지 않는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소녀 비록 열녀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도 한번 맺은 인연을 결코 배신할 수 없사오니 헤아려주시옵소서!”
“무엇이 어쩌구어째? 아니, 저런 무엄하고 괘씸한 계집이 다 있나! 여봐라! 부모의 허락도 없이 정체도 모르는 사내놈과 야합한 저년을 죽지 않을 정도로 매우 쳐라!”
그리고 매에 못 이겨 축 늘어진 한주를 옥에 가둔 뒤 매일같이 한편으로는 달래고 한편으로는 협박하며 괴롭혔다.
하지만 일편단심 한주의 마음은 변할 줄을 몰라서 옥에 갇힌 채 이런 노래로써 자신의 매서운 절개를 나타냈으니, 그 노래가 바로 먼 뒷날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의 ‘하여가(何如歌)’에 응답하는 노래로서 읊었다고 전하는 ‘단심가(丹心歌)’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든 없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노래를 전해 들은 성주가 도저히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깨닫고 한주를 아예 죽여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다.
한편, 그 동안 고구려로 돌아간 흥안태자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 흥안태자는 부왕 문자명왕이 재위 28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안장대왕은 귀국한 뒤부터 하루도 한주를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되자 그녀와 굳게 맺은 약속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백제를 치고 개백현을 점령한 뒤 한주를 구해낼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첩자를 통해 개백현의 사정과 한주가 처한 절박한 사정을 보고받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여 대신과 장수들을 대궐로 불러 계책을 논의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개백현을 수복하고 한주를 구해오는 장수에게는 천금의 상과 만호의 식읍을 내리리라!”
_ 한주ㆍ고구려와 ‘연애전쟁’ 일으킨 백제 미인(181~184쪽)
『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미실궁주가 이미 전군(殿君) 세종(世宗)의 부인이 된 사실을 알고 슬퍼하여 읊었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청조가(靑鳥歌)’도 전하고 있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 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이 노래의 내용이 매우 구슬퍼 그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했다고 하니, 아마도 당시 서라벌 최고의 인기 유행가였던 모양이다. 그 당시 신라에서는 사내 중의 사내가 화랑이요, 화랑 중의 화랑이 풍월주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월주 사다함으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애통한 나머지 불과 17세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버리게 만든 미실궁주란 어떤 여인인가.
미실궁주는 신라 도약기인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眞平王) 초기까지 약 40년 동안 오로지 비상하게 빼어난 미색 하나로 제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며 정계를 좌지우지한 여걸이다.
절세가인으로 태어난 미실은 색공(色供)을 통해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태자(銅輪太子), 그리고 동륜태자의 이복동생으로 뒷날 진지왕(眞智王)이 되는 금륜태자(金輪太子) 3부자,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 등 할아비에서 손자에 이르는 세 명의 임금과 한 명의 태자를 색정의 포로로 만들었으며, 사다함을 비롯하여 세종·설화랑(薛花郞·薛原郞)·미생랑(美生郞) 등 네 명의 풍월주를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제2세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의 딸로 태어났으며, 그녀와 공식적으로 유일한 남편이었던 세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하종(夏宗)과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보종(寶宗)도 뒷날 풍월주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은 두 차례나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源花)로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화랑들을 거느렸으니, 절세의 미인이요 희대의 색녀였던 미실궁주의 한평생은 곧 신라 화랑사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이토록 대단한 여걸의 이름을 우리는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그 어떤 역사서에도 미실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1천 400년 뒤에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덕분이었다.
--- pp.192-194, 「미실궁주ㆍ미색으로 서라벌을 울린 화랑들의 여왕」중에서
제1차 고·당전쟁은 고구려와 연개소문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 연수영은 어떤 활약을 했던가. 지금까지 출토되어 밝혀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
보장왕 1년(642년)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천 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 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그녀는 비단 실권자 연개소문의 친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들의 신망을 받았다.
보장왕 4년(645년)에 마침내 당군이 쳐들어왔다. 전쟁이 터지자 연수영은 그해 6월에 당군의 수군기지인 창려로 진격하여 적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군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 장군 겸 모달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출전,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8천여 명의 적군을 죽였다. 하지만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군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천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연수영은 수군 군주로 승진했으며, 본진을 광록도 부근 대장산성도로 비정되는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상은 서길수 박사가 해석한 석성 소장루 현판 내용이다.
이 무렵의 중국 측 사서에 당군의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해전의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사가들이 자기들의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전에서 적장 설만철은 구사일생으로 달아났다.
수군의 연전연패에 대노한 이세민은 설만철·구행엄·왕대도 등 수군 장수들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에 당군이 가시포와 노백성을 침공했지만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전선 80여 척과 군사 5천여 명을 잃고 퇴각했다.
사학자 전영미 박사 등이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에는 보장왕 4년(645년) 8월 15일에 벌어진 대장산도해전에서 당군은 1천여 척의 전함에 10만 대군을 동원하였으나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대패하여 총 군세의 절반인 수백 척의 전함과 5만여 명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수영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의 병력은 5분의 1에 불과한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달에 패전보고를 받은 당태종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적보다 5배나 많은 군사로도 이기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하랴!”
--- pp.319-321, 「연수영ㆍ우리 역사 최초의 여장군」 중에서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정한 인조는 남은 걸림돌인 세자빈과 원손 3형제의 제거에 착수했다. 참으로 모진 시아버지, 비정한 할아버지, 악랄한 임금이었다.
세자빈 강씨에게는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다. ‘역모’를 밝혀낸다면서 세자빈의 궁녀들을 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정렬·유덕·난옥 등 궁녀들은 허위자백을 거부하고 모두 죽음을 택했다. 그러자 인조는 강빈을 별당에 가두고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만 넣어주게 했다. 그리고 누구든 접근하거나 말을 건네면 엄벌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인조는 강빈을 죽여야 할 이유로 여섯 가지 죄목을 들었다.
첫째,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했다.
둘째, 심양에서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를 만들어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 칭호를 사용하며 왕비 행세를 했다.
셋째, 친정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때 왕의 침전 가까이서 들으라고 대성통곡을 하여 분한 마음을 드러냈다.
넷째,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의까지 저버렸다.
다섯째, 궁중에 흉한 물건을 파묻어 저주했다.
여섯째, 유복자를 낳아 양주 대탄에 몰래 내버렸다.
첫째 이유는 인조의 의심병에 불과한 것이고, 임금만 입을 수 있는 옷이란 청 태종이 세자에게 선물한 그것이며, 왕비 행세를 했다는 것은 심양의 신하들이 세자를 동전(東殿), 강빈을 빈전으로 부른 것을 두고 생트집을 잡은 것이다. 또 강빈이 친정어머니와 4형제의 억울한 죽음을 하소연하고자 통곡한 것은 허물이라 할 수 없고,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도 자기가 별당에 가두고 아무도 가까이하지 말라고 한 것이니 생트집에 불과했다. 또 저주를 했다느니 유복자를 낳았다느니 하는 것도 전혀 물증이 없었다. 요는 죽이고 싶다는 인조의 심경을 고백한 것과 다름없었다.
인조는 강빈을 ‘역적 강가 년’이란 뜻인 역강(逆姜)이라고 불렀고, 강빈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대간에서 거듭 간하자 이런 극언까지 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세의 여걸 강빈은 결국 강제로 폐출당해 그날로 사약을 마시고 짧지만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인조 24년(1646년) 3월 15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3일에는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을 제주도에 귀양 보냈다. 그때 3형제의 나이 각각 12세, 8세, 4세였다. 이 가운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이는 막내 석견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인조실록』을 기록 그대로 다 믿지 말라는 점이다. 강빈이 사치를 좋아했다느니, 성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다느니 하는 기록은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은 강빈에 대한 모욕이요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인격살인이다. 이는 『세조실록』을 보고 세조의 말이 모두 옳다고 여겨 사육신이 정말로 역적이라고 욕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강빈은 경제에 밝아 재물을 모으고, 또 그것을 베풀어 사람을 끌어 모으는 리더십이 있었다.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서양문물을 접해 조선의 개화를 꿈꾼 남편 소현세자를 아낌없이 지원하고 적극적으로 내조한 모습은 오늘날의 여인들도 본받을 만하다.
--- pp.577-580, 「소현세자빈 강씨―경제를 통해 부국을 추구한 여성 CEO」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