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시간쯤 지난 후 고든 씨는 고개를 들었다. 에버라드는 침착을 잃고 이 거만한 처우에 대해 약간 분개하고 있었지만, 호기심 탓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든 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만족한 듯이 활짝 웃었다.
“아, 드디어 한 명 찾아냈군. 내가 이미 스물네 명에 달하는 응모자들을 탈락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합격이오. 훌륭히 해낼 거요.”
“뭘 해낸단 말입니까?”
에버라드는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의식하며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패트롤이오. 당신은 일종의 경찰관이 되는 것이오.”
“그래요? 어디서 말입니까?”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서. 자, 내가 하는 말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오. 우리 회사는 충분히 합법적이기는 하지만, 실은 명목상의 간판이자 자금원에 불과할 뿐이오. 우리의 진짜 업무는 시간을 순찰하는 일, 즉 타임 패트롤이오.”
--- pp.16-17, 「타임 패트롤」
“물론 알고 있네. 그렇지만 자네의 얘기로 미루어보건대, 그 동굴에 자네가 출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거야. 자네의 출현이 하르파구스의 머릿속에 그 아이디어를 불어넣었다는 말이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흐음,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메디아 제국은 와해됐을 것이고, 아마 리디아나 투란인들의 밥이 되는 광경을 상상하기란 힘들지 않네. 왜냐하면 페르시아인들이 필요로 하고 있던 신성 왕권의 정당한 후계자 따위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야……. 난 그럴 수는 없어. 데이넬리아인에게서 직접 허가를 받지 않는 이상, 동굴 속의 그 순간으로 가까이 갈 생각은 없네.”
데니슨은 들어 올린 술잔 너머로 그를 응시했고, 술잔을 내린 후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얼어붙으며 마치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내의 얼굴처럼 변했다. 그는 입을 열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자네는 내가 돌아가는 걸 원하지 않는군, 그렇지?”
에버라드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잔이 손에서 떨어졌고,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쳤다. 와인이 피처럼 바닥에 흘렀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입 닥쳐!”
데니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왕이야. 내가 이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저들 위병이 자네를 갈가리 찢어 놓겠지.”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치고는 참 독창적이군.”
에버라드가 으르렁거렸다.
--- pp.129-130, 「왕과 나」
“좋아, 이제 시작해.”
그녀가 말했다. 무뚝뚝한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무라의 귀에 그녀의 시간어는 매우 음악적으로 들렸다.
그들은 베란다에서 나와 뜰을 가로질렀다. 몇몇 대원들이 그들을 보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들의 관심은 주로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노무라도 동감이었다. 그녀는 젊고 키가 컸으며, 곡선을 그린 코는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커다란 녹색 눈, 풍부한 표정을 가진 입술, 귀까지 짧게 쳤음에도 불구하고 윤기를 잃지 않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그 느낌을 눅여 주고 있었다. 통상적인 잿빛 커버롤과 튼튼한 부츠도 그녀의 완벽한 몸매나 흐르는 듯이 우아한 걸음걸이를 감추지는 못했다. 노무라는 자신이 못생기지는 않았다는 사실―약간 땅딸막하기는 하지만 균형 잡힌 유연한 체격에, 알맞게 튀어나온 광대뼈, 가무잡잡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 곁에 있으면 언제나 추남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는 생각했다. 나 같은 신참 패트롤 대원이―그것도 순찰직이 아니라, 일개 박물학자에 불과한 내가, 감히 ‘제1모계제’ 시대에서 온 귀족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 pp.162-163, 「지브롤터 폭포에서」
생각해 보게 맨스! 콜럼버스가 이곳에 와서, 타타르의 왕을 발견했을 때 어떤 얼굴을 할지 말야!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통치하는 세이첨 칸을 말야!”
샌도벌은 입을 다물었다. 에버라드는 바람을 받은 나뭇가지에서 나는 음산한 소리에 귀를 기율였다. 그는 한참 동안 어둠 속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능한 일이야. 물론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이 지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경우의 얘기지만. 그럼 우리들 자신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되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 버리는 거야.”
“어차피 그렇게 좋은 세계도 아니었어.”
샌도벌은 꿈꾸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지만 자네의…… 그…… 부모님 생각도 해야 하지 않나. 그분들도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은 것이 되는데.”
“부모님은 다 무너져 가는 진흙 오두막에 살고 있었어. 한번은 아버지가 우는 걸 본 적이 있네. 겨울이 왔는데도 자식들에게 신발을 사 주지 못했기 때문이야. 우리 어머니는 결핵으로 돌아가셨네.”
에버라드는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고개를 젓고는 껄껄 웃으며 몸을 일으킨 쪽은 샌도벌이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그건 그냥 꿈 같은 얘기에 지나지 않네, 맨스. 이제 자는 게 어때. 내가 먼저 파수를 설까?”
에버라드는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pp.208-209, 「사악한 게임」
데어드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왜 이런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죠?”
에버라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뭐라고요?”
“다른 세계라고 했습니다. 시리우스 주위를 도는 한 플라넷(아니, 이건 그리스어로 ‘방랑자’라는 의미였지)…… 아니, 구체(具體)에서 온 겁니다. 시리우스란 우리가 한 항성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하지만―그게 무슨 뜻이죠? 항성 주위를 도는 세계라니요?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군요.”
“정말 모른단 말입니까? 항성이란 태양과 같은 별로서……”
데어드리는 움찔하며 손가락을 꼬아 액을 쫓는 손짓을 했다.
“위대한 바알Baal의 가호가 있기를.”
그녀는 속삭였다.
“당신들은 광인이거나, 아니면…… 별들은 모두 투명한 수정구에 박혀 있어요.”
‘하느님 맙소사!’
“그럼 하늘을 방랑하는 별들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마르스(화성)라든지 비너스(금성), 그리고―”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만약 당신이 몰록과 아슈토레스 및 다른 별들을 의미하고 있다면, 물론 이들 별들은 우리 세계처럼 태양 주위를 도는 세계입니다. 하나는 사자(死者)의 영혼이 가는 곳이고, 또 하나는 마녀가 사는 곳이며, 다음 것은…….”
‘세상에. 이런 곳에 덧붙여 증기 자동차가 있다니.“
에버라드는 자신없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데어드리는 커다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요술사들일 거라고 생각해요.”
--- pp.262-263, 「델렌다 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