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데이트는 신랑이 평소 단골로 다니던 그만의 명소로 이어졌습니다. 개강하기에 앞서 서운한 마음을 달래던 학교 앞 만화방, 다른 프랜차이즈 통닭집을 모두 물리치고 살아남은 고대 앞 삼성통닭집, 원조라고 내세우는 수많은 아귀찜 중에서 단연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부산아구찜, 눈물을 쏙 뺄 정도로 매운 현대낙지. 이 집들을 어디서 알고들 찾아왔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문밖까지 줄을 서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별미로 괜찮겠다 싶었지만 그곳들이 우리 먹거리의 주 무대가 될 줄이야! 만날 자기 좋아하는 것만 먹으러 다닌다고 불평을 하자 저보고 고르라고 하더군요. 몇 번 함께 간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그가 어찌나 어색하고 불편해 보이던지, 오히려 제가 미안해졌습니다. 아∼ 식성도 변하는 걸까요. 입덧할 때 몹시 먹고 싶었던 음식은 바로 아귀찜이었습니다. --- p.37
초등학교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운동회를 앞두고 방과 후에 매스게임 연습을 하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그때 아빠가 짠하고 우산을 가져다 주셨죠. 그런데 같은 반 친구가 우리 아빠를 보고 “너네 할아버지니?”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그 친구하고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아빠가 최고야』는 제가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었습니다. 사실 엄마는 상대적으로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잔소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큰소리도 나고, “엄마 미워” 소리도 절로 나오지요. 하지만 아빠는 조금 다릅니다. 아빠는 엄마처럼 아이들 일상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 있지요. 그런 만큼 아빠는 언제나 제 편이었고, 제가 하고 싶은 걸 들어주셨습니다. --- p.45-47
아침부터 제가 너무 서럽게 울자, 엄마는 “뭐가 제일 힘드니? 엄마한테 얘기해 봐라” 하셨습니다. “엄마 아빠가 나만 두고 죽을까봐 너무너무 무서워.” “그건 네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잖니. 사람에게는 하늘이 정해주신 천명이 있으니 걱정 마라. 우리가 발버둥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담담하게 받아들여라. 엄마도 아빠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너는 아기 생각만 하렴. 정민아. 엄마랑 아빠가 우리 막내를 너무 늦게 낳아서 네가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드는구나. 엄마가 미안하다.” 세상에, 부모란 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다 커버린 딸에게 엄마가 미안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요. 엄마는 그저 제게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늙어버린 어머니가 다 커버린 아들을 찾아가 “너를 사랑해.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 있는 한”이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자장가를 불러준 것처럼, “엄마,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제 옆에 있어주세요.” --- p.58-59
앤은 즐겨 다니는 길이나 집이나 사물에 이름을 붙여 특별한 무엇으로 만들곤 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앤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죠. 예를 들어 집으로 오는 가로수 길을 ‘새하얀 환희의 길’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이렇게 멋진 장소를 그저 가로수 길이라고만 불러서는 안 된다고 심각하게 말하면서 말이죠. 배리 연못은 ‘반짝이는 호수’라고 부릅니다. 그러고는 앤 자신의 가슴이 떨려오는 걸 보면 딱 맞는 이름이라고 매튜 아저씨에게 수다를 떨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앤이라는 이름은 보통 Ann이라고 표기하지만, 우리의 빨간 머리 앤은 Anne를 고집합니다. 멋없는 Ann이란 이름에 e 하나를 더 붙여서 자기 자신을 좀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어하죠. --- p.88
임신 말기에는 몸이 무거워서 대부분의 임신부들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험 기간 중에는 제가 임신부라는 사실도 잊은 채 달디단 잠을 잤습니다(막상 시험이 끝났을 때는 맘 놓고 잘 수 있는데도 잠이 안 오더군요). 시험 기간에는 하고 싶은 일도 얼마나 많은지요. 읽고 싶은 책이며 보고 싶은 영화, 먹고 싶은 음식까지. 하기 싫은 청소와 옷장 정리까지 시험 기간에는 하고 싶어집니다. 시험 끝나고 하면 될 아기 옷 준비도 ‘아기가 언제 나올지 모르잖아’ 하며 조금씩 조금씩 모두 삶아놓았습니다. 시험이라는 괴물이 마치 흘러가는 제 인생을 한 자리에 잡아둔 것처럼 삶을 천 퍼센트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싫어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정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싫어하는 일들을 조금만 느긋하게 생각하며 봐주자고요. 아무리 어렵고 싫어하는 일이라도 인생에 영원한 건 없습니다. 즐거운 일도 괴로운 일도 모두 지나간답니다. --- p.102
임신을 하자 모든 분들이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브라보” 하며 환호작약하게 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신랑이 협조를 안 해줄 때도 그랬고, 임부복에는 별과 달밖에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에도, 배가 불러오면 어떤 옷을 입어도 예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는 더욱더 그랬습니다. 아니, 배가 불러올수록 왜 그렇게 예쁜 옷을 사고 싶은 욕망은 더해지던지요. 왜 이럴까 싶어 아기를 낳은 선배 엄마들에게 밥을 사가며 노하우를 물어보았습니다. 선배 엄마들이 제 종알거림을 들으며 여유롭게 해준 말은 “정민아, 지금이 제일 예쁘다"였습니다. --- p.109
뒤돌아보면, 아 그때 내가 참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마음이 모자랐던 것이겠지요. 사람 사이의 관계도 나무 기르듯 물 주고 벌레 잡아줘가며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인데 품 들이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친구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시기에 깊이 공감해 주지 못한 게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모른다는 얘기는 어쩌자고 세월이 가도 그토록 끈덕지게 ‘진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민이를 되찾으러 가기에는 길이 너무 멀고, 정민이가 남긴 가르침만 마음에 진하게 남았습니다. ‘웬만하면, 정말 웬만하면 귀를 열어놓고 살아야지. 있을 때 잘해야지.’ 그리고 염치없는 기대 하나를 덧붙입니다. ‘누군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생각해 주는 이가 있었으면. 부디 그도 나에게 인색하지 않았으면.’ --- p.199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가의 이름도 대단하고, 작품 속에 담긴 통찰력도 놀랍다는 얘기에 책을 꺼내 들지만 실패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도 모르는 채 책장만 넘기다가 결국 책을 덮었을 때, 왠지 주눅이 들죠. 남들이 말하는 명작도 소화시키지 못하는 깜냥밖에 안 되나 싶어서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서 어린이책은 부담이 훨씬 적습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점도 맘에 들고, 문학적 의미나 숨겨진 작가의 의도 같은 걸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을 만큼 명징한 것도 좋습니다. 읽고 나서 ‘아, 좋다’라고 말하면 그뿐입니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통찰이 어른들 책보다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좀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전달한다는 매력이 있죠. 무엇보다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맘에 들고요. 그러니 아이가 없더라도 가끔은 동화책을 읽어보길 권합니다. 『백설공주』도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고,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색다르게 느껴질 테니까요.
---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