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첫 주에 저희 교회에서 제주도 선교를 갔습니다. 선교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 밤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라마순'이라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태풍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400명의 대인원이 비행기 7~10대에 나눠 타고 금요일에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데 라마순이라는 태풍이 제주도를 향해 서서히 북상 중이었던 것입니다. 태풍의 눈은 제주도 남방 2백여 킬로미터 안 쪽으로 진입하여 시간당 20킬러미터의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신문과 뉴스에서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해 보니 우리가 비행기를 타는 그 시각에 태풍의 눈이 정확히 제주도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다음 날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태풍의 진로 분석을 마친 뒤, 하루 더 늘어난 일정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들과 머리를 맞대고,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연구했습니다. 마침 교회에 우수한 성능의 빔 프로젝터가 몇 대 있으니까 그것을 활용해서 '좋은' 비디오를 함께 보기로 했습니다. 함께 모여 두 편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모두들 아주 재미있어 했습니다. (...) 하루 더 제주도에 머물게 되었지만 우왕좌왕하지 않고 그 전날 밤 미리 대책을 세워서 그 날을 잘 보낼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입니까? 태풍 앞에서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오면 비행기가 뜰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애쓰지 않고 그 한계 안에서 인생을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안에 뿌리내린 신앙에는 조금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앞뒤 안가리고 마구 밀어붙이는 것을 신앙이라고 오해하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태풍 사건의 경우에도 미리 알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이기네" 류의 찬송을 부르면서 공항으로 몰려갑니다. 다 몰려가서는 연좌 농성하듯이 손잡고 앉아서 기도합니다. "주여! 태풍이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 (...) 제가 하나님과 오랫동안 사귀어 와서 알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풍이 온다고 하면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기도가 소용이 없으면 이번에는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님, 대한항공 담당자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사 비행기가 이륙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고도 담당자들이 비행기를 이륙시킬 수 없다고 하면 믿음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윽박지릅니다. 이 상황에 비행기를 띄우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제 날짜에 돌아오려다가 비행기에서 몰사될 일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실지 모릅니다. "대체 왜 너희들은 내가 준 법칙 안에서 살지 않고 그것을 거스르느라 그렇게 애를 썼더냐? 변두리로 가 있어라."
사고의 기능을 중지시킨 채 용기백배하여 앞뒤 안가리고 행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한계를 알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기독교는 왜 자기만 옳다고 하는가?
기독교는 늘 자기만 옳다는 배타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포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배타적'이라는 말과 '포용적'이라는 말의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배타적'은 나쁘고 '포용적'은 좋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배타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시험문제를 출제할 때에 네 가지 보기 가운데서 한가지 정답만을 선택하도록 했다고 해서 학생이 선생님께 "한 가지 정답만 고르도록 하는 것은 배타적입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다른 세 가지 보기가 정답과 유사해 보이더라도 정답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는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다.
세상에는 구원의 길처럼 보이는 여러 종교가 있다. 이들이 얼핏 보면 다 정답처럼 보인다. 겉만 보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도와 비슷해 보인다. 다 사랑과 자비를 말하고 선행을 베풀라는 비슷한 도리인 것 같다.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의 보기가 다 정답같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출제자 하나님의 명확한 선언을 들어보자.
"다른 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예수님 외에)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
"아들(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장 12절).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배타적이다. 배타적이더라도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실력이 있는 분이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장 9절)" --- 본문 중에서
이렇게 성이 음지에서 양지로 고개를 내민 대신, 이 세대가 더 이상 거론하기를 원하지 않는 기피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죽음', '심판'과 같은 것들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사람들이 '죄'라는 말을 얼마나 듣기 싫어하는지, 20세기에는 '죄'라는 말을 대신할 만한 대체 용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습니다. 심리학적 용어입니다. 무엇 때문에 자꾸만 '죄, 죄, 죄' 하며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하며 '죄'라고 말하지 않고 심리학적 용어로 좀더 완곡하게 표현해서 '환경에의 부적응', '정서장애', '습관성 집착' 등으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마조히즘(masochism)'이니 '사디즘(sadism)'이니 하는 용어들도 사실은 인간의 죄를 병리적인 현상으로 부드럽게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옳지 않은 접근입니다. --- 본문 중에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수용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종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려고만' 합니다. 좀더 기도하자, 좀더 베풀자, 줌더 전도하자, 좀더 실수를 줄여보자 이런 식입니다. 뿌리는 감히 둔 채 곁가지만 만지고 잎사귀만 건드리는 태도입니다. 그렇게도 행위론, 공로론을 부정하면서 다시 그리로 기어들어가는 오류를 범하는 셈입니다. 왜 자꾸 행위를 강조합니까? 그게 단순하고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식의 관성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동'에 앞서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본질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태도'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God has love"가 아니라 "God is love'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다"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빛이십니다. "God has light"가 아니라 "God is light"입니다. 즉, 사랑과 빛은 하나님의 행위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자체이십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