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이 ‘교회다움’에 대해 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분명히 그들에게 새로운 제안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틀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우면서도 원래 있었던 교회의 원형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 안에는 교회와 목회에 대한 생각의 자유와 창조성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목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는 목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방향성과 외연을 넓혀주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를 예배당과 동일시하고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일과 분리시키는 신앙적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진짜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현미경을 통해 사물을 보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불문하고 기독교가 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넘어 보다 넓고 깊고 높이 신앙적 외연을 넓힐 뿐 아니라 종교의 틀이라는 감옥에 갇혀있기보다는 자유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어가기를 원한다. 비그리스도인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프롤로그」중에서
“기독교도 아닌 제가 너무 힘들어서 찾아왔습니다.
기도하는 방법도 잘 모르지만….
여기 오니 많은 눈물이 납니다.
힘든 일 벗게 해주세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도와주세요. 아멘.”
“어렸을 때 가보고 처음 와본 교회입니다. 너무 마음이 평안해지고 정말 모든 근심과 마음에 쌓아둔 삶의 짐이 내려진 듯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이런 특별한 공간이 있다는 걸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교회 안 나간 지 오래되어 좀 뻘쭘하기도 하고…. 감사기도 드리고 갑니다.”
“힘들고 지친 마음 달래러 제주도에 왔습니다.
비록 신앙생활을 하진 않지만 이곳에서 작은 위로를 받고 갑니다.
늘 감사하는 삶, 배려하는 삶 살겠습니다.”
순례자의교회에서 그는 세상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평안을 만나게 된다. 병이 낫지도 않고 병으로 죽지도 않았는데 마음속에 가득하던 두려움과 불안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변함없는데 더 이상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다. 더 이상 질병이 그를 흔들거나 쓰러뜨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기암시나 자기최면, 감정이입 때문에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주어지는 평안, 살고 죽는 문제를 초월하게 하는 하늘의 평안이기에 가능한 변화다. 순례자의교회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샬롬이다.
---「1장 이곳은 순례자의교회」중에서
교회다움이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교회는 예수 자체이자 예수로 살아가는, 즉 ‘현존하는 예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다운 교회는 물리적 규모가 아니라 의미와 내용을 중요시해야 한다. 예배 공간이 작고, 특정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하지 않고, 헌금이 적어도 전혀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살아내는, 일시적이어도 좋고 항구적이어도 좋은 교회! 바로 이것이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이고, 현실에서 이런 교회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다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다움을 추구하자는 이야기 자체를 불편하거나 불온(?)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해서 낯설고 익숙하지 않으면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보는 교인들의 인식이야말로 교회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었다.?
---「2장 원래부터 있던 교회를 찾아」중에서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된’ 생명체다. 제삼자에게 조종받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스스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교회는 생명 없는 무기체, 일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교회는 존재 지향적이어야 한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에서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며 드러난다. 만약 교회가 존재 지향적이지 않다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업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교회를 ‘예수님 자체’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 대한 관점과 인식을 완전히 달리 해야 한다는 소리다.
교회를 ‘예수님 자체’로 보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먼저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업의 지향점이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 생애의 핵심은 사역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셨고 하나님도 예수님 안에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 자체’임을 깨달으면 성과나 업적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3장 교회다움을 향한 갈망」중에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외에는 자신을 아는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고 이야기한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아신다.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전하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이름과 정체성, 역할을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아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속까지도 헤아리는 분이다. 성령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며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기억나고 깨닫게 하신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의미인데, 삼위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인간을 향해서도 드러난다. 인간의 상태와 처지를 헤아리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호하고 돌보시며, 심판하는 순간에도 힘을 잃고 망해버린 그분의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신다. 예수님도 목자를 잃어버린 양처럼 흩어져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바라보셨고, 성령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 모습이 안타까워 탄식하며 중보기도 하신다.
이와 같이 이해와 공감을 통해 유지되는 다양성 속에서 삼위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로 연합하고 동역하신다. 각각의 위격이 주체성과 독립성을 갖고 있지만 그로 인해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대신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 인정과 존중이 서로를 자신의 사역에 초청해서 함께 일하고 함께 기뻐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삼위 하나님은 그렇게 서로를 섬기며 도우셨다. 그리고 이런 섬김과 협력의 속성 또한 인간을 향해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내놓으셨고, 예수님은 사망에 매인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 성령님은 인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 나타내신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남을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이룰 때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속성인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이라는 관점으로 다른 사람과 공동체와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용납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4장 세상에 없던 교회를 꿈꾸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