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년, 미켈란젤로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톨릭교회인 시스티나 성당 안에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가득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손수 설계한 높다란 발판 위에 올라가 있다. 그는 나무와 밧줄로 만든 발판 꼭대기에 서서 작업을 한다. 그림을 들여다보느라 천장에 얼굴을 바짝 들이민다. 얼굴에 물감이 뚝뚝 떨어진다. 그는 조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촛불을 밝힌 채 밤늦도록 일한다. 다리가 쑤시고 온몸이 아프다. 미켈란젤로는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는,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을 셈이다. --- p.12
카라바조의 작품은 로마 사람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고, 그의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날이 갈수록 거칠고 사나워졌다. 기록을 보면, 카라바조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1606년, 카라바조는 아마도 노름빚을 놓고 시비가 붙어서 급기야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살인을 저지르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카라바조는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쳤다. 그는 남쪽의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로 갔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도, 그는 [세례 요한의 참수](1608년) 같은 걸작을 연달아 그렸다. 하지만 또다시 사고를 쳐서 곤경에 빠졌다. 카라바조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려고 했다. 로마에 가면 사면을 받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1610년, 카라바조는 홀로 남겨진 채 고열에 시달리다가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 p.21
1806년 어느 봄날,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사는 궁에 불려 갔다. 분쇼라는 화가와 그림 실력을 겨루는 자리였다. 호쿠사이는 커다란 붓에 먹물을 듬뿍 묻히고는 힘차게 붓을 놀려 굽이치는 강을 그린다. 그러고는 닭 한 마리를 붙잡아 닭의 발을 물감통에 푹 담근 다음, 강을 그린 그림 위에 닭을 풀어놓는다. 닭이 커다란 화폭을 가로지르며 타닥타닥 발자국을 찍는다. 마치 흐르는 강물 위에 우수수 떨어진 단풍잎처럼 보인다. 분쇼는 패배를 인정한다. 호쿠사이의 기막힌 그림에 모두가 입이 딱 벌어진다! --- p.32
바로 5년 전, 모네와 마네 등 여러 화가들이 파리의 작업실과 카페에서 모였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미술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새로운 대상을 새로운 방법으로 그리고자 했으며, 여느 화가들과 달랐다. 화가들이 죽 그래 왔듯 몇 달이고 화실에 틀어박혀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어떤 날씨에도 바깥에서 그림을 그렸다. 특히 모네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장면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날씨와 계절,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깔을 포착하여 그림에 담았다. 그의 그림에는 짧게 끊어지는 거친 붓자국이 가득했다. --- p.44
1886년, 조르주 쇠라는 파리에 있는 화실에 앉아 있다. 쇠라는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 점을 좀 더 찍어야 한다. 그는 두 해 동안 이 작품에 매달렸고, 이제 곧 마무리를 한다! 1885년에 쇠라는 이 작품을 인상주의 전시회에 내놓으려고 했지만, 전시회가 취소되고 말았다. 쇠라는 그림을 좀 더 손보기로 했다. 그는 스스로 만든 새로운 기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기법은 나중에 ‘점묘법’으로 알려지게 된다. 쇠라는 선을 쓰지 않고 여러 가지 색깔의 작은 점을 수천수만 개 찍어서 그림을 그린다. 멀리서 보면 색점이 사라지고 색이 섞여 보이는데, 바로 코앞에서 보면 하나하나 또렷한 점이다. 색점을 찍은 그림은 온통 빛으로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 p.48
칸딘스키의 그림은 활기차고 밝은 색채가 담겨 있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화실에 간 칸딘스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을 보았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지만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이었다. 바로 자신의 그림을 거꾸로 세워 놓았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색채와 형태의 배열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이 무엇인가를 꼭 닮을 필요는 없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추상 미술’이라고 부르는 그림의 시작이었다. 추상 미술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색채와 형태, 질감이 어우러져 즐거움을 준다. 칸딘스키는 남은 생애 동안 줄곧 추상화를 그렸고, 이 그림들이 보는 사람의 영혼과 연결된다고 믿었다. --- p.65
프랑스의 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 살고 있다. 그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미술 전시회에 소변기를 내놓기로 한다. 1917년, 뒤샹은 욕실 제품 전시장에서 남성용 소변기를 골라 ‘R. 머트’라는 서명을 한다. 그리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회에 내놓는다. 이 전시회는 누구나 출품비만 내면 작품 두 점을 전시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경악한다. 이것은 뒤샹이 손수 그린 그림이나 직접 만든 조각품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산 ‘레디메이드(기성품)’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작품은 거부당한다. 하지만 뒤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소변기를 직접 ‘골라서’ 전시장에 내놓았고 새 이름을 붙여서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게 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물건을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이런 작품을 ‘레디메이드’라고 불렀고, 이를 ‘반예술anti-art’이라고 일컬었다. ‘레디메이드’라는 새로운 개념의 창안 이후, 미술은 이제까지의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 p.68
칼로는 평생 동안 30여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그녀는 자주 입원을 했고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몸에 갑옷처럼 두른 석고 코르셋에도 그림을 그렸다. 세상을 뜨기 1년 전, 칼로는 멕시코시티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의사들은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칼로는 한사코 우겼다. 결국 칼로는 구급차를 타고 들것에 실려 갔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감격했고, 전시회는 화려하게 막이 올랐다. --- p.77
20년이 넘도록 예술가들은 워홀의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예술가들은 ‘공장’에서 즐겁게 놀고, 워홀의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워홀은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수백 점 만들었다. 유명인들과 그 화려한 세계에 푹 빠진 워홀은 자신이 펴낸 잡지 [인터뷰]에 그들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워홀은 돈을 버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사업을 잘하는 것도 모두 ‘예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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