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의 문학비평가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A) 「창작과비평」과 「문학동네」를 모두 비판하는 비평가와 B) 「창작과비평」만을 비판하는 비평가와 C) 이것도 저것도 아닌 비평가로 말이다. 이때 「창작과비평」은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민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문학동네」는 ‘너무나 제대로’ 민감하다는 이유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
현실원리의 제국인 「동물의 왕국」을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노쇠한 사자 주위는 항상 하이에나가 들끓는 법이다. 무얼 먹든 배가 부른 것은 똑같을지 모르나 토끼고기를 먹었다는 것과 사자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상징적 차원’에서 완전히 다르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이후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자와 싸워 이겼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창비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으로서 창비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싶다. A형 비판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A형 비평가들 중 상당수는 창비가 계속 존재하길 바라고 있다), 승산있는 싸움만 하기로 방향을 조정하는 대신에 이전보다 더욱 승산없는 경기에 나아가길 바라며(삼미 슈퍼스타즈의 정신을 상기하라!), 이것도 저것도 불가능하다면 깨끗이 산화(散花)하여 새로운 전위들의 밑거름이 될지언정 결코 자신을 하이에나의 먹이로 남겨두지 말라고 말이다.
물론, 창비가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승산 없는 싸움에 몸을 던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창비 역시 오늘날 문학시스템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적 존재인 백낙청이 공시적 활동을 접은 후, 창비가 그나마 B형 비평가들에게 위와 같은 비판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창비 스스로 자발적인 해체를 감행하여(언인스톨하여) 그로 인해 확보될 공간(또는 언덕)을 새로운 전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문학’을 제2자연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비평가들은 이제 창비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만약 앞으로의 문학에 어떤 희망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창비 너머에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창비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역시 해체될 때가 된 것이다.
--- pp.155~156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관점에서 ‘황석영’이라는 문제에 접근해왔다. 첫째는 황석영의 후기소설에 대한 논의로 『손님』, 『심청』, 『바리데기』를 주로 다루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전통서사(굿이나 무가 또는 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근대소설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이 일단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전통서사가 아무리 본래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서구적인 것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이상 이미 서구적인 것을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외래적인 것 對 본래적인 것’이라는 구분을 고수하면서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설적 엉성함을 ‘새로운 형식실험’으로 옹호한다. ‘시적 서사’와 같은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진짜 ‘황석영이라는 문제’는 그런 결함과 억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었는데, 여기서는 일단 두 가지만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첫째는 문학 외적인 것으로 왜곡된 출판시장 속에서 이루어진 출판자본의 적극적인 지원이고, 둘째는 문학 내적인 것으로 ‘치유의 도구’라는 소설관이다. 이 두 가지 중 보다 문제적인 것은 당연 후자인데, 사실 코엘료와 하루키가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황석영은 이들을 대중작가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그와 이들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치유로서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자아탐색담’ 또는 ‘수난기’ 형태를 띠고 있으며, 거기서 역사는 항상 다른 어떤 것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풍경으로만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후자는 항상 전자의 무대장치로만 기능하고, 전자는 후자의 매개 정도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소설에서 아이러니를 가뿐히 추방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후기 황석영 소설의 본질을 입담화(구비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황석영 개인기(?)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아이러니서사(소설)라는 양식의 구술서사(또는 우화)로의 퇴행을 의미한다.
--- pp.25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