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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셔먼 알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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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여드름이라 불러라. 모두들 날 여드름이라 부른다. 물론 이건 내 진짜 이름이 아니다. 진짜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자신을 ‘여드름’이라 부르는 15세 소년이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끈다. 인디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고아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났을 때 도망가버렸고,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유방암으로 죽었다. 그래서 그는 이곳저곳 임시로 자신을 양육해주는 가정을 전전하면서 사는데, 사춘기 소년답게 반항기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거쳐 가는 양부모들의 추악한 면모들을 보고 실망하며, 게다가 여드름으로 가득한 자신의 얼굴에 자신도 없는 그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소년원에서 우연히 만난 ‘저스티스’(Justice)라는 이름의 백인 소년과 친해진 그는 ‘유식하게’ 세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을 불살라야 해.”) 저스티스에게 반해서, 그가 시키는 대로 총 두 자루를 들고 은행에 들어가 무차별 난사를 감행한다. 총을 쏘다가 갑자기 쓰러진 주인공이 깨어났을 때, 정신은 멀쩡하나 다른 시간대에 다른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1975년, 인디언 인권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는 백인 FBI 요원이 된 것이다. FBI 요원으로서 인디언 운동가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다시 깨어나니 이번에는 인디언 꼬마가 되어 있다. 1876년, 인디언과 백인 기병대 간의 마지막 전투였던 ‘리틀 빅혼 전투’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사로잡은 어린 백인 군인을 죽이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그는 졸도한다. 다시 깨어나니 19세기, 인디언 마을을 소탕하러 다니는 늙은 기병대 척후병이 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인디언 학살극에 참여하게 되고, 그 와중에 어느 인디언 꼬마를 살리려는 백인 소년병을 돕다가 탈영병으로 몰려 쫓기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시 깨어난 그는 이제 현재의 어느 시점에 경비행기를 조종하는 지미라는 백인 중년 남성이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비행을 가르친 압바드라는 이슬람계 친구가 2001년 9?11 사건과 비슷한 자살 테러를 시카고에서 저지르는 것을 TV를 통해 목격하고, 설상가상으로 바람을 피우다 아내에게 들킨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자신 역시 배신자가 되어 있음을 안 순간 그는 비행기를 몰고 날아올라 바다로 추락한다. 또다시 깬 그는 이제 술 취한 인디언이 되어 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노숙자인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백인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저주한다. 한 백인 남성과 옥신각신하다가 그 남성의 딸 사진을 보고 그 역시 아들의 사진을 꺼내는데, 그것은 바로 주인공의 어릴 적 사진이다. 돌고 돌아 결국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까지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에 놀라 눈을 뜨자, 주인공은 여전히 은행에 있고 총 역시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있다. 총을 난사하기 직전에 정신을 잠깐 잃었던 것이다. 환상적인 시간여행을 겪으며 뭔가를 깨달은 주인공은 자신이 총을 쏘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경찰에 자수하고, 자신을 그동안 아껴주었던 경찰 데이브의 집안에 양아들로 들어가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게 된다. |
미국 역사의 치부를 관통하는‘인디언판 허클베리 핀의 모험’
2007 전미도서상과 보스턴 글로브 혼 도서상을 석권한 ‘미국 문단의 최고 블루칩’셔먼 알렉시의 화제작 한때 북아메리카 인디언(정치적으로 올바른 명칭은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영성, 지혜를 다룬 책들이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에 힘입어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서글픈 역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룬 책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인디언 하면 떠오르는 ‘영적인 지혜의 전수자’란 이미지는 빛바랜 과거형에 불과하다.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갇혀, 그들은 대부분 영적으로 아주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가정폭력, 생계형 범죄 등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모든 것을 숙명처럼 안은 채 말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과연 희망이란 게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플라이트』의 주인공 역시 그런 아이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났을 때 도망갔고,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유방암으로 죽었다. 그래서 임시로 자신을 양육해주는 가정을 전전하면서 살고 있다. 스무 군데나 되는 양부모 집에서 살았고, 학교도 스물두 곳이나 다녔다. 가진 거라곤 바지 두 벌과 셔츠 세 장, 속옷 네 벌, 야구모자 한 개, 양말 세 짝과 소설 세 권이 전부다. 게다가 사춘기 소년답게 반항기로 가득 차 있어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전 종목 석권해버릴 작정이다. 난 이 나라가 싫다. 부자면서도 그 염병할 돈을 나누지 않는 작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버릇없는 열 살짜리 애들 같다. 그들은 정글짐과 미끄럼틀, 시소를 독차지한다. 그리고 다른 아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회전목마를 딱 한 번이라도 탈라치면, 피똥을 쌀 정도로 그 친구를 두들겨 팬다. 난 이따금씩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픈 충동이 일 만큼 화가 치밀기도 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꿈도 꿨다. 사람들을 죽이는 꿈. 나는 언제나 이런 꿈을 꿨다. --- pp. 37-38 자, 이런 상황에서 이 아이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닐까. 이변이 없는 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술주정뱅이, 인생 패배자 아버지의 길을 속절없이 그대로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순탄한(?) 인생행로에 이변이 일어난다. 그것도 구치소에서 만난 자칭 혁명가 친구에게 홀딱 세뇌되어 총 두 자루를 들고 은행에 들어가 무차별 난사를 감행하는 시점(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의 조승희, 강남 고시원 흉기 난동의 정상진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에 말이다. 청원경찰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가 눈을 떠보니, 다른 시간대에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 그것도 하필 인디언 인권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는 백인 FBI 요원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자기가 무차별 학살의 죗값을 치르러 지옥에 온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옥치고는 너무도 현실과 똑같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그는 시간대를 오가며 여러 사람의 몸을 전전하는 시간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인디언 인권운동가를 죽이는 일에 끼어들었다가 정신을 잃고 마는 그. 다시 깨어나니 1876년 인디언과 백인 기병대 간의 마지막 전투인 리틀 빅혼 전투 한복판에서 인디언 꼬마가 되어 있다. 다시 깨어나니 19세기 무렵 인디언 마을을 소탕하러 다니는 늙은 기병대원이 되어 있다. 다시 깨어나니 2001년 9?11 테러 후의 백인 아저씨가 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주정뱅이 인디언 부랑자의 몸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는 바로……. 『플라이트』는 출간 후 “인디언판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불리며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미국 역사의 부끄러운 치부들을 관통하며 화해와 사랑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유머러스하면서도 가슴 절절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감동적인 것은 주인공이 아버지의 몸속에 들어가는 대목이다. 아버지가 왜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는지, 왜 그런 구질구질한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깨닫는 순간, 소년은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말해봐.” 할아버지가 다그쳤다. “뭘요?”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라고 말하란 말이야!” 아버지는 버티고 대들고 싶었지만,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 이 형벌이 끝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다시 말해봐.”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더 크게.”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아버지는 절규했다. “더 크게.”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아버지는 계속 절규했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다!” 할욾버지가 방을 떠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아버지는 절규를 그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기억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당한 아버지는 병원 복도에서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병동 어딘가에서 어머니는 나를 낳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들 수가 없었다.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도망쳤다. 달리면서 그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두 눈을 감으면서 나도 눈을 감아버렸다. --- pp. 189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지배하며 망가뜨려왔던 증오와 폭력의 역사에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백인 경찰관과 그 동생 부부의 도움으로 서서히 현실과 화해하는 법,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미국 인디언의 역사니 인종 갈등 따위, 우리가 알 게 뭐야!’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명품 성장소설의 미덕과 매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한때 아버지를, 사회를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경험을 (어쩌면 지금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이 이야기에 눈물 나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갈 곳 없는 아이 하나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 소설을 읽으며 웃다 보면 알게 된다. 언제나 그 깨달음은 눈물과 함께 온다. 여드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이 마이클이라는 이름을 찾는 순간, 도망(flight)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비상(flight)으로 끝나는 순간이 그때다.” ([작품해설]에서) 폭력은 증오를 먹고 산다.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공대의 조승희, 2008년 10월 20일 논현동 고시원의정상진 역시 그랬다. 만일 그때 그들에게 단 한 명이라도 깊은 관심을 갖고 온정을 기울여주는 이가 곁에 있었더라면 그처럼 끔찍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외감과 분노, 증오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혼란의 아노미 속에서 당혹스런 양상으로 분출되는 요즘,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