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간, 아버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더라도 현관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는 소리가 나면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오는 기척이 2층에 있는 우리 방까지 또렷하게 전해졌다. 현관 앞에서 멈춘 발소리, 문 열리는 소리, 구두를 벗어던지는 소리, 복도를 걷는 소리. 그 소리에 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때문에, 나는 하나 잘못한 것 없이 이불 속에서 몸이 뻣뻣해져서는 숨을 죽인 채 누워 있었다. 배신당할 걸 알면서도 땀이 밴 손을 그러모아 기도를 했다. ‘오늘 밤에는 싸움이 안 일어나게 해주세요.’--- p.21
몰래 이부자리를 벗어나 소리를 죽여 맹장지 문을 열어보면 입술을 질근 깨문 무표정한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눈꺼풀과 볼이 부풀어 올랐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다. 맥없이 풀린 눈에서 이따금 눈물이 흘러내려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발가벗은 그 인간은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어머니 위에 올라타 거친 숨을 토하며 격렬히 움직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몸 안을 돌고 있던 울부짖음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 하면서 부들부들 떨려왔다. --- p.23
‘저쪽에 가 있으렴.’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턱짓을 하다가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그 인간이 내 존재를 알아차린다. 큰일났다 싶으면서도 어머니를 구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인간이 그 짓을 중단하고 내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는 말없이 나를 마구 두들겨패기 시작한다. 뺨에 일격에 당하자 한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더니 이어 맹렬한 통증이 밀어닥친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새빨갛게 충혈된 성남 짐승의 눈이 노려본다. 내려치는 커다란 손바닥을 죄다 맞아내는 동안에도 내내 내 작은 머릿속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 p.24
“까불지 마, 똘마니 나부랭이 새캬. 이 몸은 V파가 뒤를 봐준다고.”
그 말에 나는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내 몸은 이미 그 녀석 앞에 다가서 있었다.
“V파가 뭐…… 새캬!”
오른손 스테이트 잽이 멋들어지게 녀석의 턱에 작렬했고, 녀석은 벽에 부딪치며 쓰러졌다.
내 싸움의 미학은 원 펀치. 오른손 스트레이트 잽 한 방으로 끝내는 것이었다. 첫 번째 가격으로 가차 없이 상대의 이빨을 부술 수 있는가 여부에 성패가 달려 있다. 그 순간만큼은 각성제나 섹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센 쾌감이 온몸에 끼쳐온다. 강한 상대에게 주먹을 날렸을 때는 그 쾌감의 강도는 배가된다. 상대의 주먹이 내 얼굴뼈를 짜릿하게 적시면 ‘콰콩’이라든가 ‘빠지직’ 같은 만화에나 나올 법한 소리가 나며 투지가 치솟는다. 싸움이란 차례차례 이어지는 쾌감의 연속, 그뿐이다. ‘콸콸’이란 글자가 콕콕 찍한 만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몸이 쾌감으로 흘러넘친다. --- pp.83~84
검정 필름으로 선팅한 프레지던트나 벤츠 AMG 사이로 조그와 DJ1이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뒤꽁무니에는 불량배 녀석들도 참가했는지 차체가 낮은 미국 차도 몇 대 눈에 띄었다. 이제 마흔 대가 넘었다. 앞뒤로 늘어선 대열이 개미군단을 연상시켰다. 축제 행렬로 착각한 걸까. SR과 TW에 탄 일반인도 대열 속에 끼어 있었다. 우리 멤버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와, 저거 봐!”
운전석의 고가 소리를 질렀다. 경사진 길을 달리던 CBR의 로켓카울이 속도와 진동에 못이겼는지 팍하고 떨어져나갔다
“멍청한 놈.”
차 안이 웃음소리로 요동쳤다. 쇳덩어리가 지면에 충돌하여 굉음을 냈지만 수십 대에서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이내 묻히고 말았다. 떨어져나간 카울은 처량하게도 뒤에 오는 대열에 짓밟혀 눈 깜짝할 사이 박살이 나버렸다. --- pp.87~88
나는 열아홉에 시너를 시작한 이래 완전히 각성제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맞고 나면 몇 시간 동안 섹스가 이어지는 듯한 쾌감이 온몸에 흐른다. 그 느낌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양을 늘려 진한 액체를 만들었다.
‘좀 세려나…….’
잠깐 멈칫했지만 좀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는 욕망이 더 나아가게 했다. 주사기를 쥔 오른손 엄지에 힘을 넣어 액체를 끝까지 밀어넣었다. 순간 몸이 허공에 휙 떠오르는 것 같더니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뒤로 쿵 자빠지고 말았다. 바닥이 몸을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뒤통수부터 등, 엉덩이, 뒤꿈치까지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머릿속에서는 경계경보가 울렸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 pp.105~106
나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너무나 후회스러워 눈물이 났다 히사오와 나오키가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둘뿐만이 아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땅바닥에 납작 머리를 숙인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가토 씨,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이젠 됐으니까.”
눈물이 흘러 뺨을 적신다.
‘일을 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나는 통렬히 절감했다. 지금까지, 바로 이 직전까지는 그저 사람만 보내면 끝이라는 안이한 태도로 해왔던 것이다 그런 나의 나이브한 태도가 잘못이었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좀더 제대로 하자, 동료들에게도 거래처에도 폐를 끼치지 않도록 제대로 일을 해나가자고 마음속에 굳게 새겼다. --- pp.120~121
‘죽으면 편해질까? 이대로 그냥 죽어버리면 동료들도 나도 편해질지 모른다. 죽을까? 그래, 죽자.’
죽는 방법을 생각해봤다. 전차에 뛰어들기,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기, 목매달기, 치사량의 각성제 맞기…….
죽은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피범벅이 돼 전차 차체에 들러붙은 내 살덩어리. 아스팔트 위에 짓이겨진 내 머리통. 천장에 매달려 축 늘어진 내 몸뚱이. 졸려 매인 내 목. 흰자위를 드러내고 입네서 거품을 토하며 스러져 있는 내 몸…….
다음 순간 떠오른 광경은 내 어릴 적 사진이었다. 아스라한 빛으로 바랜 사진과 가난했던 시절의 가족이 떠올랐다. 잡초가 무성한 정원에는 녹슨 물뿌리개가 뒹글고 있고, 바람 빠진 축구공을 안은 유지 옆에 내가 있다. (……) 그 눈빛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가슴이 옥죄어오며 고통스러웠다. 그런 눈빛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동료들과 그들의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여기서 죽을 수 없다. 포기해선 안 된다. 난 살아야 한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 죽는 건 어렵지 않다. 죽는 건 한순간이다. 어떤 상황이든 책임을 지고 계속 살아가는 편이 훨씬 어렵다.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그걸 하고 나서 죽어도 늦지 않다. 전력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해놓고 죽는 거다. 그래, 아직 죽기엔 이르다.’
그런 맘이 들자 어디에 그런 기운이 남아 있었는지 몸에 힘이 가득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pp.156~158
“사장님, 역시 꿈이란 참 좋은 것 같아요. 요전에 사장님이 꿈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무슨 꿈을 갖고 있나 하고 생각해봤거든요. ‘아버지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 내 가족은 내가 자라온 가족처럼 되게 하진 말아야겠다. 결혼하게 되면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고 아이도 소중히 키워야지.’ 하는 게 제 꿈입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이런 생각을 해왔거든요.”--- pp.178~179쪽
강연이 끝나 주섬주섬 강단을 내려오고 있을 때 한 중년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가토 씨, 오늘 강연 잘 들었습니다. 무척 감사합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바뀔 수 있다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악수를 하며 잡은 그녀의 작은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인상적인 것은 쥐는 손에서 보기와는 달리 강한 힘이 느껴졌다는 점이다
그 손을 쥔 순간 나는 생각했다.
‘얘기하길 잘했다. 한 사람이라도 내 얘기에 힘을 얻은 사람이 있다니…….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이렇게 멋진 일이구나.’
사실 바로 직전까지도 나는 모든 게 두려웠다. 어쩌면 다시 뒷골목 세계와 얽혀 말썽이 일어날지 모른다,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두려움이 단숨에 내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걸 느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이렇게 소중한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무언가 강하게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뭐지? 이 두근거리는 느낌은, 즐거운 마음은, 행복한 기분은? 온몸에 차오르는 이 기분 좋은 느낌은……. 혹시 이게 선사한다는 걸까?’
문득 혹시 이게 사랑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랑…….--- pp.193~194
과거의 나는 걸핏하면 엔진이 멈췄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 없이 가뿐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가족과 동료들의 사랑을 연료 삼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데 나이나 처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짐’이란 아주 조금의 용기를 쥐어짜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행복해지기 위한 길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정답일지 오답일지 모르는 채 그 많은 것들 중 하나를 선택해 ‘이게 옳을 것일까?’ 하며 자문하며 걸어나가는 게 인생이겠죠.
새로운 인생으로 정진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마다 회사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장님 문고리 잡기처럼 하나하나 새로 배워가며 했습니다. 실패할 때마다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를 자문하면서. --- pp.217~218
사실 나는 너무나 외롭고 부정적인 겁쟁이에 불과합니다. 내가 한 것이라곤 바뀌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뿐입니다. 내 안의 작은 가능성은 때로는 나빠지고 때로는 뭉개지기도 했지만 이제 간신히 꽃을 피웠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분명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나와 같은 당신과 만나서 얼굴을 마주보며 인연을 맺고 싶습니다. 그리고 함께 걸어?고 싶습니다. 그게 내 꿈입니다. 그러니까 용기를 내세요. 함께 앞으로 한 발 내디뎌요.
---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