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이 그토록 환상을 품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버스 기사들이 이따금씩 버스를 몰고 프리쥐닉 슈퍼마켓 진열장 속으로 돌진해서 그 참에 가족들에게 줄 서물을 나꿔채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화장실 수세장치 생산업자들이 줄을 잡아당기면 터지는 폭탄을 변기 속에 설치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욕조는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하고 있는지, 내부에 인공 비 장치를 달아서 바깥 날씨가 화창한 날 승객이 택시 안에서 우비를 입어야만 하는 좀더 비싼 택시를 왜 발명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중략) 늘 똑같은 짓을 하고 또 하는 인간의 맹목적 습성은 나를 경악케 한다. 은행 직원이 수표를 먹지 않는 것에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이전에 어떤 화가도 ‘흐늘거리는 시계’를 그릴 생각도 못 했다는 것에 나는 놀란다…….
--- p.273
일곱 살에서 여덟 살까지 나는 꿈과 신화의 지배 속에서 살았다. 나중에 가서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나의 기억은 진짜와 가짜를 뒤섞어서, 너무나 부조리한 몇몇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한 다음에라야만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의 어떤 추억거리가 러시아에서 벌어졌다고 할 때,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추억을 가짜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번도 그 나라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 p.58
스물두 살. 나는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의 학생이었다. 회화 콩쿠르에 앞서, 나는 화폭에 붓을 대지 않고 그림을 그려보임으로써 대상을 거머쥐겠다고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1미터 거리를 두고 화폭에 물감을 뿌렸고, 이는 놀라운 점묘화법의 그림이 되어 주어진 주제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데생과 색감이 얼마나 적절했는지, 나는 일등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미술사 시험을 보게 되었다. 각별히 출중한 내 실력을 입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나는 시험장에 들어갔다. 더욱이 이 시험은 내가 공들여서 준비한 과목이었다. 심사위원단이 자리한 연단에 올라가서, 나는 제비뽑기로 주제 하나를 골랐다. 난 정말 엄청난 행운아였다. 미리 공부를 해서 자신있게 풀 수 있었고 풀고 싶었던 바로 그 문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는 어찌할 수 없는 권태에 사로잡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선포했다. 세 심사위원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내가 더 똑똑하고, 주어진 문제를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심사받기를 거부한다는 나의 발언에 좌중은 경악했다.
--- p.36
나의 변신은 전통이다. 왜냐하면 전통이란 바로 변화이고 또다른 껍질의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성형수술이나 절단을 말하는 게 아니라, 르네상스(다시 태어나기)를 말하고 있다. 나는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나간다. 그리고 나는 끝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시작부터 계속해나간다. 나는 결국 늙어갈 것인가? 나는 언제나 죽음에서 시작했었다. 죽음과 부활, 혁명과 르네상스, 이것이 달리적인 전통의 신화들이다.
--- p.386
달리는 달리와 동등하다는 것, 나는 언제나 똑같다는 것, 나의 역설적인 전통은 내 개성의 실제적 힘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나는 계속해나간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는 탑에서 나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한다. 심지어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작가들은 보통 일생을 다 산 다음에 말년에 가서 회고록을 쓴다. 모든 사람들과 반대로 가는 나는 회고록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사는 것이 더 지적인 것으로 보였다. 산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인생의 반을 다 청산할 줄 알아야 한다. 경험으로 풍성해진 나머지 절반의 인생을 계속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과거를 죽여서 벗어버렸다. 이 경우 나의 허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내가 살아온 혁명적 무정형의 삶을 말한다.
--- p.385
갈라는 살다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를 돌처럼 딱딱하게 만들지 않았고, 그러기는커녕 하나의 소라게로 만들었다. 외부와의 관계에서 나는 철옹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조갯살처럼 물렁한, 초(超)물렁한 상태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계들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날, 그 시계들을 흐물흐물하게 그린 것이었다. 그 그림은 어느 피곤한 날 밤에 그려졌다. 그날 나는 두통에 시달렸는데, 내게는 극도로 드문 일이었다. 우리는 친구들과 극장에 갈 예정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는 집에 있기로 결정했다. 혼자 남게 되자 나는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녹아내리는 치즈의 ‘초물렁한 상태’가 제시하는 문제들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다. 식탁에서 일어난 나는 늘 하던 대로 작업하던 그림을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보려고 작업실로 갔다.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은 포르리가 근처의 풍경화로, 저물녘 투명한 빛이 바위들을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전경에는 이파리가 없는 잘려진 올리브 나무를 초벌로 그려두었었다. 이 풍경은 그 어떤 아이디어를 위한 바탕으로 쓰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는 대체 어떤 걸까? 놀라운 이미지가 필요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불을 끄고 작업실을 나가려는데, 말 그대로 해결책이 ‘보였다’. 흐늘거리는 시계 두 개가 보인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올리브나무 가지에 처량하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두통에도 불구하고 팔레트를 준비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두 시간 후 갈라가 극장에서 돌아왔을 때, 나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의 하나가 될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 p.385~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