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이런 아침에 내가 밝은 면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내 나이 스물넷에 아이오와 주 밖으로 나가본 건 무려 단 한 번뿐이며, 지금까지 살면서 해온 일이라곤 모자란 동생 뒤치다꺼리에 엄마 담배 사다 드리기, 그리고 엔도라의 훌륭한 어르신들을 위해 물건을 봉투에 담아드린 일뿐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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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점점 작아지는 거야.”
“그래?”
“맞아. 형이 점점 작아지는 거야. 오그라들어.”
가끔은 멍청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어니마저도 내가 쳇바퀴에 갇혔다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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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밤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차를 몰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로 떠나는 꿈을 꿨다. 어렸을 때 TV에서 본 가족들을 상상했다. 잘생긴 사람들과 빠른 차, 나만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 가족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로 바뀐 그런 장면을 꿈꿨다. 나만은 이 모습 그대로인 꿈.
--- p.50
길버트 그레이프는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무수한 통조림과 먹을거리를 쌓으면서 사색가, 아니면 몽상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 실력은 완전자동에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뭘 하는지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생각이 아예 제멋대로 어슬렁거렸다. 몸과는 달리 나도 마음만큼은 한자리에 붙박여 있지 않았다. 디모인에 있는 대형쇼핑몰 멀헤이에 가거나, 차를 몰고 사막을 가로지르거나, 오마하의 어느 지붕에 올라가 토네이도가 하늘을 가르며 몰려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생각 속에서만큼은 내가 이 가게나 마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 p.120
어니는 병원에 일주일쯤 있었다. 아주 긴 시간이었다. 나는 늘 어니가 멍청해서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 녀석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의 최고의 축복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었다. 어니가 한쪽 눈을 잃기 전까지는.
--- p.162
“하나님께서 우리 앨버트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셨으니 나도 하나님에 대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엄마는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문을 밀어젖혔고, 에이미 누나가 울어대는 어니를 안고 그 뒤를 따랐다. 그 다음이 래리 형과 제니스 누나였고, 내가 맨 끝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됐다. 일요일 아침 시간은 우리가 유일하게 누리는 순수한 행복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신을 찬양할 때 우리는 잠옷 차림으로 서로에게 음식을 던지며 TV에 나온 목사들을 비웃었다.
--- p.187
“네가 뭔가 해줬으면 좋겠어.”
그 애는 갑자기 내가 간절히 기다려왔던 그런 섹시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든지.”
난 마침내 우리의 순간이 왔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 그 애가 하라는 건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칠판에 “안녕”이라고 쓰라는 거였다. 아니면 “고마워” “보고 싶을 거야” 그딴 걸.
--- p.218
내 동생의 의상이야말로 특별했다. 미국답고, 행동도 그랬다. 맨 처음에 넘어뜨린 아이를 일으켜주려다가 다른 아이를 쳤고, 그게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혼란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내 동생은 거의 모든 면에서 오늘날 미국이 처한 상황과 대단히 흡사했다.
--- p.248
아래층에서는 엄마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얼굴도 두껍다. 난 그렇게 생각해. 뭐? 어니는 괜찮아. 고마워. 더럽지, 그래. 하지만 괜찮아. 그리고 당신한테는 권리가 없어……. 당신은 권리가 없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TV에서는 푸른빛이 깜빡이면서 나지막하게 광고가 나오고 있었고, 엄마가 누구랑 얘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상대는 부엌에 있는 것 같았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갔다.
“천만에……. 어니에 대해서는 우리 생각이 옳았어……. 어떤 시설, 어떤 보호소도 이보다 낫지 않았을 거야……. 우리는 견뎌냈어…….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뭐? 미안하겠지……. 당연히 미안해야지…….”
--- p.346
“길버트, 너는 여러 면에서 아빠랑 똑같아. 너무 성실한 게 단점인 것도. 만약 아빠가 떠났더라면…….”
“누나…….”
“만약 아빠가 집을 떠나버렸다면, 아마 아빠는……. 내 말 알지. 나는 네가 아빠처럼 되는 걸 원치 않아.”
“하지만 나는 절대…….”
“그건 모르는 거야. 아무도 모르는 거야.”
--- p.353
트럭으로 돌아가서 전조등과 시동을 끄고 창문을 내린 채 기다렸다. 입술을 깨물어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첨벙거리는 물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어니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물고기야, 나는 물고기야.”
--- p.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