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랑과 약간의 관심을 구걸하느라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에게, 주머니에 돈이라곤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십자가처럼 지고서 고통받은 사람에게,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 유산 상속자라는 자격은 유죄판결이나 다름없다.
나는 혹자들이 이렇게 말하리라는 걸 안다.
"할아버지가 엄청난 유산을 남겨줘서 돈이 많대. 그런데 무슨 불평이람?"
나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기억을 열어 내가 겪었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할 뿐이다. 처음으로 유산 상속의 자리에 불려갔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걸 알지 못했다. 내게는 단 한가지 갈망밖에 없었다.피카소 씨족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달아나기 위해 나는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남긴 몫을 포기했고, 정상적이라면 나와 나의 이복형제 베르나르에게 돌아가야 할 파블리토의 몫도 거부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지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멍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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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절망에 빠뜨릴 권리가 위대한 예술가에게는 있는가? 절대를 추구하는 그들의 행보에는 무자비한 권력 의지가 불가피한 것일까? 그들의 작품이 제아무리 찬란할지언정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단 말인가?
나의 가족은 저 천재가 쳐놓은 덫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해나가는 데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나의 아버지, 오빠, 어머니, 할머니의 피와 나의 피, 그리고 한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기며 피카소를 사랑한 모든 이들의 피를.
나의 아버지는 그의 폭정의 굴레 아래에서 태어났으며, 그에게 속고 실망하고 비천해지고 망가진 채 그로 인해 죽었다. 냉혹하게도. 그의 가학 취미와 무심함의 노리개가 되었던 오빠 파블리토는 스물넷의 나이에 락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식도와 후두가 타버리고, 위가 파괴되고,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모습으로 피범벅 속에 누운 오빠를 발견한 건 나였다. (중략) 락스를 마심으로써 오빠는 고통을 끝장내고, 자신을 기다리는 암초들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 암초들은 나 또한 노리고 있었다. 피카소 이름을 가진 우리는 우롱당하는 희망의 소용돌이라는 덫에 걸린 사산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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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한테 깜짝 선물을 하나 주지.”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는 수첩 한 장을 찢더니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걸 접고 또 접는다. 그의 강력한 손가락 사이에서 마치 마술처럼 종이 강아지가, 종이꽃이, 종이 암탉이 탄생한다.
“마음에 드느냐?”
특유의 쉰 목소리로 그가 묻는다.
파블리토는 말이 없고, 나는 더듬거리며 말한다.
“네... 예뻐요.”
우리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피카소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종이나 마분지, 또는 성냥을 잘라 만든 그 형상들이, 그가 마술사처럼 만들어내던 그 모든 눈속임들이 오늘날 내가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그의 야심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은 모든 걸 할 수 있으며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걸 무의식중에 인지시키려는 야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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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께서 방해받고 싶지 않으시답니다.”
우리는 머리를 떨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것이었다. 우리를 위한 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찬미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문전에서 거절하는 사람을 어떻게 찬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다고들 말했다. 그들은 그가 친구들을 라 캘리포니아의 대문까지 배웅하는 것을 보았고, 친구들을 위해 정원의 레몬을 따는 것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미용사 외젠 아리아스에게 크로키 몇 장을, 니스의 재봉사 미셀 사폰에게는 데생 몇 점을 주었다. 하물며 자신의 개한테도 접시 하나를 헌정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가 피카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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