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소변) 보고 금방 돌아온다던 선생이 함흥차사이자, 아이들은 선생 집 뒤뜰의 대나무를 잘라서 장난을 차고 있었는데, 급기야는 훈장어르신께서 돌아오셨다. 돌아와 보니 훈장이 아껴 둔 대나무를 잘라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지 않은가. 화가 난 훈장은 홰(화)를 냈다.
"이눔들! 내가 아끼고 요긴케 쓸라는 대를 잘라서 말 타고 장난질이구나!"
아이들은 성난 훈장한테 물론 거짓말을 했다. 훈장어른을 기다리다 심심해서 각자가 제집으로 가서 자기집 대나무를 잘라 와서 놀고 있다고. 그러자 훈장은,
"니눔들 집 대나무는 우리집 대나무만큼 좋은 대가 아닌데, 보아하니 니들이 가지고 노는 대나무는 모두 좋은 대구만-. 그러니 내 집 대가 틀림없지"라고.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훈장을 욕보였다 한다.
"그럼요. 선생가죽先生家竹은 개가죽皆佳竹(선생님 집의 대나무는 모두 아름다운 대나무)이지요"라고. 뜻은 선생을 위하여, 발음은 학동인 저희들을 위하여였으리라.
--- pp.24∼25
한참 전이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애가 "엄마! 베네똥이 뭐야?"하고 물었다. 발달심리학을 가르치는 나는 "배냇똥은 엄마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몇 번 누는 대변인데 새까만 색이야. 왜냐하면 뱃속에서 양수를 마셔서 그런데, 아기 낳은 엄마의 처음 짜는 멀건 젖 즉 초유를 먹이면 깨끗이 배설되지. 그렇지 않으면 훗날 아기의 장이 안 좋다고 한단다"라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런 장황한 대답을 다 들은 딸애는
"그걸 왜 간판에 써 놨어? 옷 파는 집이던데?"라지 않던가. 그때껏 나는 프랑스제 옷의 상호가 베네똥인 줄을 몰랐으니까. 이렇게 농경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는 사라져 버렸다.
--- p.56
"누우야, 내가 왜 검제띠기(댁) 꼭뿌뜰이 아이라."
일찍이 출향한 탓에 고형의 것들을 많이 잊어버린다. 어릴적에 이웃하여 자란 이들을 만나면 그래서 더욱 미안해진다.
"봐라 봐라. 니 내 모를라? 왜 연당띠기 개똥이아제 아이라! 니 생각 안 나나? 갑놈이 하고 니 내가 지내가면 개똥이 똥묻었다! 하고 놀리고 했잖나?"
듣다보면 생각이 새롭다.
아들인 줄 알았는데 낳고 보니 딸애라 하여 섭섭하다는 마음에서 섭섭이라고 이름 부른 아이가 있었고, 그 동생은 제발 아들을 낳으라고 빌었는데도 또 딸을 낳았다 하여 또섭이라고 불렀지…(중략)…암소골 뿌뜰이, 뒷골 뿌뜰이, 원두들 뿌뜰이, 검제띠기 꼭뿌뜰이 등 구별하느라고 부모의 택호에다 조부모의 택호까지도 동원하기 일쑤였던 저 원시시대를 살아왔지. 시대 차이에 따라 인간의 소망이나 가치가 다를 수 있고 다르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이의 이름짓기도 그 한 증거가 될 것이다.
--- pp.66∼67
배고프고 서러웠던 옛 아낙들은 자장가의 가사를 잘도 지어서 불렀다. 먹은 것이 있어야 젖이 나오지. 어미가 배곯았는데 무슨 젖이 나오겠나마는, 우는 아기 입에 젖꼭지를 물리면 아기는 죽을힘을 다해 빨아 보아도 먹을 것이 나오지 않자, 다시 울다가는 탈진하고 만다. 이런 때 엄마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고 애간장이 진다. 이런 심사를 담은 애달픈 노래가 자장가였으니, 자장가는 잠투정하느라 칭얼거리며 보채는 아기를 재우려고 불렀다기보대는, 서러움을 주체 못하는 모성의 애간장을 녹여 내는 푸념노래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기를 위한 노래라기보다는 엄마 자신을 위한 노래였으리. 그래서 우리의 자장가는 슬프다 못해 한스럽기 그지없다. 따라서 저 서양의 악성들이 작곡했던 자장가와 목적과 차원이 달랐다. 엄마나 할머니의 애터지는 설움을 너무나 잘 아는 아기는 구성진 자장가 가락을 들으면서 배고픔에 지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효자요 효손이었다.
--- p.133
사춘기적 대전에서 자랄 때였다. ‘채소장시’ 아주머니들이 골목마다 외치고 다니며 채소를 팔 때였다. 채소장시 아주머니는 묻지 않아도 자기소개를 곧잘 했다. 6·25 때 남편이 상이군인이 되었거나 행방불명 된 과수댁들이었는데, 이들은 머리에 채소를 이고 행상을 다니면서 시부모 봉양은 물론이고 시누이와 시동생들과 자녀의 학비까지 감당하는 억척 여장부 가장들이었다 이들은 한 번 사 준 집은 번번이 방문하여 점심도 대접받곤 했는데, 점심상이라야 밥 한 그릇과 수저만 한 벌 걸쳐 주는 정도였지만 황송해하면서 재담을 늘어놓아 밥값으로 웃음을 선사하곤 했다.
저리 가면 전주구유/이리 가면 이린데유/밭둑길로 가면 한밭(대전)이구유/논둑길로 가믄 논산이지유/강 건너면 강경이더라구유/고리 가면 고부땅이지만유/그리 가면 금산이라유/조리 가면 조치원이유/요리 가면 용미리래유/질러 가면 진잠면으로 가구유/둘러 가면 둔내천이지유/신작로로 가면 신탄진이 나오구유/돌아가면 도마동이 나와유…
--- pp.157∼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