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 순간, 제레미는 목에 엄청난 충격을 느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몸이 털썩 쓰러졌다. 거의 동시에 눈앞을 스치는 긴 칼날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자도 보였다. 그녀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어둠 속으로 달려가던 살인자는 바닥에 떨어진 제레미의 머리에 걸려 비틀거렸고, 머리는 가장자리 도랑으로 굴러갔다. 이제 제레미는 완전히 죽었다. ‘저세상’으로 들어온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충격 속에서 그저 다음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경찰차가 근처에 도착하자 살인자가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실수로 지워진 그림처럼 그는 공원의 그늘 속으로 쓱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 세련된 검은 양복 위에 걸쳤던 사무라이 의상을 벗는 사내의 모습이 제레미의 눈에 포착되었다. 사내의 얼굴 어딘가에선 아시아인의 모습이 조금 느껴졌고, 검고 기다란 턱수염에 두 눈은 증오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 p.13
제레미는 공포에 질려 거칠게 뒷걸음질 쳤다. “뭐라고요? 그럼 당신들은 식인종이에요?” 플린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기 천사들은 항상 이런 반응을 보였다. “아니,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냐! 우리는 감정을 섭취하는 거야. 자네의 피부색은 자네가 기쁨이나 쾌락, 사랑, 행복과 창조 같은 인간의 긍정적인 감정에 호감을 느낀다는 표시일세. 붉은 천사들은 불행, 슬픔, 우울함과 파멸의 감정에 이끌리지. 우리는 각자 그렇게 먹고 존재하는 거야. 감정은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증기의 형태로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온다네. 우리는 그것을 ‘안개’라고 부르지. 푸른 천사거나 붉은 천사거나 상관없이 모든 천사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풍족함과 만족의 감정을 나타내는 하얀 안개야. 찾기는 어렵지만 널리 사랑받고 있지. 기쁨에서는 파랑 안개, 질투에서는 초록 안개, 욕심은 노랑 안개, 분노는 빨강 안개, 행복은 보라 안개, 복수심에서는 주황색 안개가 피어오르지……. 또, 사악한 욕망이나 살인의 감정에서는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거야. 자, 가서 자네가 감미롭게 느끼는 감정을 찾아보고 그 안개를 먹어보게나.” 제레미가 눈썹을 찡그렸다. “검정과 빨강은 그리 맛있을 것 같지 않네요.” --- p.26
어떤 사내가 한 여자를 따라 버스에 오르자 별안간 천사들이 생기 있게 반응했다. 푸른 천사들은 즉시 여자 주위로 모여들었고, 붉은 천사들은 남자 주위로 접근했다. 사내는 여자에게 계속 엉큼한 시선을 보냈다. 푸른 천사들은 흥분해서 여자를 보호하려고 여자에게 속삭였다. “저 남자, 뭔가 좀 수상해. 못 봤겠지만 널 따라왔어. 조심해야 된다고. 널 공격할 거야. 틀림없어! 운전기사한테 말해봐.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절대 혼자 내리면 안 돼!” 붉은 천사들은 행동하려는 사내를 부추겼다. “괜찮을 거야. 여자는 울겠지. 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못할걸. 넌 몇 시간 동안 여자랑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거야! 너무 불쌍히 여기고 고민을 많이 하면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다고!” 사내는 붉은 천사들의 영향에 매우 예민한 듯 위험한 분홍빛 안개를 풍기는 반면, 의지가 강해 보이는 턱과 고집스러운 이마를 가진 젊은 여자는 푸른 천사들의 충고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여자가 잠시 가방을 뒤지는데 흰옷과 검은 띠가 제레미의 눈에 언뜻 띄었다. 여자는 사내에게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고, 누가 자신을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버스에서 내렸다. 제레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푸른 천사들은 일제히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쉬었고, 붉은 천사들은 조롱 섞인 승리의 웃음을 내뱉은 후 잠재적인 성 범죄자이자 음식 제공자를 호위하러 갔다. --- p.44
거실에서는 두 연인이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타는 듯한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갈색 머리의 젊은 여자는 회색 실크를 한 벌로 입은 모습이 매혹적이었고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는 그녀가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도 되는 듯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머리에서 발산되는 푸른 안개는 무진장 먹음직스러웠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설사 그가 침이 고이는 반응에 즉시 저항했다 해도 배고픔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어떤 두려움 섞인 배고픔이었다. 결국 그는 본능에 양보하고 쾌락의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인가? 제레미는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커플에게 다가갔다. --- p.87
“왜 내가 죽은 게 당신 잘못이라는 거지?” 마치 그녀가 진짜로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절박하게 물었다. “말해봐! 나한테 설명해보라고! 당신 책임이라고 말했잖아. 당신이 뭘 했는데? 난 왜 살해당한 거지?” 젊은 여자는 그저 울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몸을 돌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무덤들 사이를 지나갔다. 제레미는 여자를 따라가려다 무덤들 주위에 세워진 엉덩이가 통통한 아기 천사들과 천사들의 조각상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실상을 안다면……. --- p.103
“아마도 (알베르트가 한 손 위에 다른 한 손을 포갰다.) 여기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이 있고, 그 위에 또 다른 세상인 우리들의 저승이 있는 거야. 영혼들이 통과하고 두 번 죽지 못한다는 절망 속에 고착될 때까지 텅 비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세상. 만약 이 세상이 변화무쌍했다면? 여기에 나타나는 존재들에 맞출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신의 행위는 어디에 있을까?” 색소폰 연주자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 음악은 악기가 혼자 노래를 부르고 울부짖는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너무나 완벽하고 멋졌다. 그것은…… 마법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미소를 지었다. “봤지? 저러니 신의 존재를 어찌 의심하겠어. 저런 음악을 들을 때는 저것이 바로 천사지! 신은 천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거야.” 그는 붉은 천사들을 향해 흘깃 적의의 눈길을 던지고는 가시 돋친 어조로 덧붙였다. “악마가 저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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