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 물론, 아무리 모진 ‘바람風’이 분다 해도 아직은 ‘바람希望’이 있기에 살아 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또 삶이 끝나는 날까지 무조건 살아 내야 하는 것이, 내가 아는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살아 내기 위해서 세상에 걸어 대는 존재들의 수작은 자기자기, 형형색색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계절이 오고 가는 동안 나는 그 존재의 이유를 알기 위해 주제 넘는 주제들로 말을 걸었다.
‘외로우니까 사람’인 것처럼, 외로우니까 우리는 존재한다. 외로움이야말로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identification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외로움은 관계로만 식별되는 실존들의 가장 고고한 아우라이다. 관계 속에서만 비쳐지는 존재의 외로움 때문에, 우리는 또한 외롭지 않기 위해서 부단하게 애를 쓴다. 외로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거미가 망을 치듯 관계를 만들어 간다. 물질과의 관계이든, 생물과의 관계이든, 사람과의 관계이든 무언가로부터 소외되기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돈으로부터, 명예로부터, 사랑으로부터 외롭지 않으려는, 그렇지만 결국은 외로움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는, 외로움과의 싸움 속에서 살다가 가는 것이 존재의 운명이다. 그래서 구차하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를 내리지 않더라도, 사람이 무리를 짓고作黨 누군가와 수작하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수작과 작당은 관계를 통해 외로움을 확인하는 사회적 표현이다. 나도 내 외로움을 확인하기 위해, 내 외로움을 덜기 위해, 그리고 내 존재를 식별하기 위해, 사계절의 테마로드를 걸어왔다. 때마침 길은 끊기고, 날은 어두워지고, 찬바람이 일어났다. 갈 데도 없었으니 길이 끊긴들 날이 어두워진들 무슨 상관있으랴만.
많이들 어렵다고 한다. 사람살이가 녹록치 않다고 한다. 더구나 언제부터인가 눈 귀 코 입이 없는 전설 속의 ‘혼돈混沌’이 다시 세상에 떠돈다. 그러나 풀들은 안다. 바람이 자고 또 햇살이 비칠 것을. 시인의 노래처럼 바람보다 납작 엎드린 풀들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이 괴물의 몸에 ‘일곱 개의 구멍’을 내고 세상을 다시 열어 갈 것이다. 갈 길은 멀고 신발의 무게는 천근이다. 그래도 터벅터벅 걸으며 감당해야 할 내 중력의 몫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인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는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와 오규원 시인의 『순례-서』에서 따왔다. 원래 두 시인의 시 구절은 세상에 대한, 삶에 대한 관조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을 담고 있다. 그 시 구절을 사람살이의 의지를 담아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로 살짝 바꾸었다. 두 분 시인께 누가 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다.
열두 달을 돌며 주저리주저리 원고지를 채운 것도, 이면지 한 장이 아쉬운 지금 수만 근의 종이를 축내면서 이 책을 내는 것도, 살아 내기 위해 세상에 걸어 대는 수작이다. 그랬기에 그 이면지들에게, 나무들에게, 재생으로 매몰된 글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는 것은 솔직히 어줍잖은 일이다. 다만, ‘불황의 늪’에 서식하는 대표적인 지표식물이 ‘책’이라는 엄중한 현실에도, 꿋꿋하게 길을 가는 많은 출판인들에게, 그리고 거친 이 글을 다듬고 출간해 준 초암 편집팀에 감사할 따름이다. 또 귀한 사진들로 부실한 문맥을 채워 준 최태영 박사님과 나병필 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바람이 불어도 살아야 한다’는 결단이 아니더라도 ‘바람을 타고 놀러 가고 싶다’는 작은 불꽃 하나만이라도 마음에 퉁길 수 있다면 내 몫은 다 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여전히 바람이 분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눈에 덮인 세상이 비록 환상일지라도 거기에서 처음처럼 새로운 희망을 건져 올린다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눈썹에 눈이 하얗게 쌓이도록 얼굴로 몰아쳐 오는 눈발이 주는 뜨거운 촉감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 생각이 망상이어도 좋다. 눈발은 낙엽처럼 건조하고 스산해진 마음을 살포시 덮어 준다. 그래서 가을의 우울한 마음뿐만 아니라 한 해가 끝날 때의 지친 기분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는다. 겨울은 그렇게 모든 삶의 사이클에서 처음이 된다. --- pp.15~16
올겨울 내내 바람을 맞으며 새를 쫓아다니고 싶다. 겨울바람에 뼈가 시린 나의 진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나마 내 인생의 모르핀이 생성될 때는 바람이 들고 바람을 탈 때이다. 내 조악한 근육의 살점들이 바람에 흩어지고 산채로 조장鳥葬될지라도, 나는 바람을 타는 새가 되고 싶다. 자유이고 싶다. --- p.34
‘바람의 결’ 속에서 계절이 오고 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세월의 풍상이 뼈에 사무쳐 그 계절의 감각이 몸에 뱄다는 뜻이다. 가끔씩, 기상청의 강추위 예보와 칼바람 속에서도 언뜻언뜻 봄바람의 촉감을 느끼는 내 몸이 야속해진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이제 늙어 가는 것이다.
---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