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오히려 왕자병을 키우기에 훨씬 유리해 보인다. 적어도 대부분의 남자는 어머니의 완벽한 떠받듦 속에서 왕자로 자란다. 결혼해서 가장이란 호칭이 나올 만한 나이인 우리 세대나 윗세대의 남자들은 별 예외 없이 그렇게 자랐다. 낮아짐을 방지하는 안전장치 하나는 일생에 걸쳐서 마련된다. 무참하게 눌리는 군대는 예외지만, 가정이란 영역 소위 말해서 개인성이 드러나는 영역에선 여자 위의 지위가 보장된다. 현실의 너저분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아줌마들이 가끔 하는 얘기 중에 "남편은 애야, 애" 라는 말이 있다. 잔소리를 해야 움직이는 아이 같은 존재, 가사노동의 질곡에서 잘도 빠져 나오는 존재, 같은 부모로서 책임을 같이 나누기보다는 실상은 많은 경우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 그래서 결국은 성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그 자질구레함과 낮아짐, 평범함을 별로 경험하지 않는 존재가 아닌가.
--- pp. 234∼235
모든 발언을 국회의원의 의사발표 수준으로 취급하는 그 과도한 진지함. 이렇게 모든 발언을 너무 긴장되게 무차별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일상성을 강조하고 사적인 영역에서의 실천을 너무 과하게 강조하기 때문은 아닌가하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말과 행동의 규범이 너무 빽빽이 들어서고 그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해 여유와 아량이 설자리가 없어 보였다. 그런 규범이 성역화되어 버리면서 자꾸 눈치를 보게 하는 집단적 검열문화가 겉자랄 가능성까지 보였다.
--- p 257
지난번 어떤 미스코리아가 성형미인이라고 해서 자격 논란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었던 적이 있었다. 스캔들식으로 다루어진 그 자격논란을 보면서 자연미인이 갖는 특권의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타고난 아름다움이 누려야 할 감탄을 돈을 써서 훔친 것 같아 그런 것인가?
조금 논리를 바꿔보면 자연미인은 본인이 아무런 노력을 안한 채 타고난 것에 무임승차하듯이 특권을 누리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수술하느라 고생하고, 돈까지 투자한 이의 노력 때문에라도 성형미인에 대해 더 평가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몸을 아름답게 하고 싶은 욕구의 현대적인 답변이든 외모차별의 극복이든 어떤 이가 성형수술을 선택하게 되는 데는 여러 차원에서 축적된 욕구와 갈망과 결핍이 합쳐져 있을 것이다. 의술의 발전을 통해서나마 그런 욕구와 갈망과 결핍을 가진 이들, 즉 선천적인 조건(이것도 무척 상대적이지만)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돈이라도 모아서 극복하는 게 나에게는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 p 218
그러나 내 인생의 영화나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찾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화는 나에게 판타지로서만 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향을 받거나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현실에서 못 이루는 욕구를 채우는 수준에서 대부분 머무른다. 먹는 욕구, 여행의 욕구, 일탈의 욕구,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 사랑에 대한 욕구,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가 가져오는 복수, 역전의 욕구까지 다양한 욕구를 확인하고 채우면서 즐긴다. 그래서인지 영화 보는 기준이 까다롭지 않다. 솔직히 아무 영화나 다 좋아한다. 너무 남성적이고 도식적이어서 견디기 힘든 서부극이나 도무지 감정이입이 안 되는 공상영화만 아니면 다 본다. 그리고 너무 어렵지만 않으면 된다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상징성이 지나치고 관객을 너무 고려해주지 않는 영화는 좋아해 본 기억이 없다. "어떤 영화 볼래" 라고 친구들이 물으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이 "너무 예술적이려고 노력하지 않은 영화" 이다.
--- pp. 204∼205
딴지가 믿어줄 지는 몰라도 딴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항상 중요하게 여겨왔다. 똥싸는 것, 밥먹는 것, 즐기는 것. 언제였나 나에게 호감이 있었던 남자와 센트럴 파크에서 데이트를 했다. 센트럴 파크 주변에는 정말 고급스럽고 전망이 근사한 집들이 많은데, 그이가 "아 돈벌어서 저런 데서도 살아보고 싶지 않아요?" 라고 폼을 잡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내 대답이란 "나는요, 어디에 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요, 아침에 제 시간에 똥이 시원하게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해요. 하루 생활의 질을 결정하잖아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저는요, 자살한 사람들은 다 변비환자일 거라고 믿는 사람이에요. 똥만 잘 누고나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요. 살 만하잖아요."
--- p 196
가끔 친구들과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엄마 부모님이 보여주신 자식에 대한 전적인 믿음, 옳고 그름을 자식에게 강요하지 않는 거리두기, 자식의 판단에 대한 존중이 흔한 것은 아니구나 싶어. 그래서인지, 엄마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평이 '자기 자신에게 편한 사람, 자기 혐오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였어. 아마도 엄마가 부모님에게 받은 믿음 때문에 힘들 때도 엄마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힘들 때도 엄마 자신을 믿고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됐던 것 같아. 우리 강이도 엄마에게서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신이 없다. 단둘이 살아서, 적당한 거리와 그만큼의 거리를 필요로 하는 믿음을 편안히 만들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고, 엄마는 그게 많이 아쉬워.
--- pp. 134∼135
"야, 자기 일을 하겠다는 엄마가 아기 기저귀 하나 가는 데 그렇게 진을 빼서 어떻게 살래. 자기 수준에 맞게 아이도 키워야지." 라고 참견을 했다. "네가 가진 교육철학을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 해볼 만한 일이야. 하지만 교육철학도 엄마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어야지.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너 자신에게 최대치를 요구하고, 절대적인 모성애와 헌신성을 요구하면서, 네 개인적인 야망, 성취욕은 그대로 살아있으니 그게 조화를 이루겠니? 일하는 엄마가 아이를 그런 식으로 키울 수 있겠어? 최소한의 아이양육에 대한 효율성이 보장이 안 되는데."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런 말이 하고 싶었다.
--- pp. 145∼146
개인과 집단과의 균형을 이야기한다면 나의 이십 대는 집단의 행복을 위해 개인이 사라진 불균형의 시기였다. 특히 나의 경우, 개인의 이름은 성고문 사건으로 도드라졌지만,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추스려야 하는지, 나를 어느 만큼 죽이고, 어느 만큼 살려야 하는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늘 혼돈 속에 있었다. 늘 "네가 하면 더 효과적일 거야, 사람들의 절박한 소리가 들리지 않니?"라는 사회적·도덕적 명분 속에 내 행동코드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여성문제에 있었다. 결혼생활에서 남녀가 왜 이렇게 달라야 하는지? 왜 여성문제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뭔가 지나친 자의식에 반해 인격적으로는 뭔가 결핍된 듯이 취급되어야 하는지? 왜 내가 여성과 관련하여 부당함을 느낀다면 왜 노동문제에 대한 의식과는 달리 냉소당하고 조롱당하는 느낌인지? 항상 의문이었다. 사실 선택이라는 말을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개념으로 본다면 이 경우 역시 적절치 않겠다. 당시 내가 원하는 것은 그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고, 그것에 답할 가장 적절한 수단이 여성학이라고 분명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성학을 선택한 것은 내 삶 속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 나의 절박함에 귀 기울였고, 다른 모든 것을 뒷전으로 미루었다. 앞뒤 안 재고 답하려 했던 의지가 있었고, 그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유학 등의 구체적인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이때 한 선택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 결과가 좋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나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존중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의 삶에 대한 예의를 찾은 느낌이고 내가 나를 믿어도 좋을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 pp. 33∼34
그런 나의 분열적 의식은 1986년 가을 첫 재판을 받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했던 주민등록증위조 때문에 사소하다면 사소한 범죄의 피고인이 되어 공범도 없이 재판을 혼자서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인천지법 문 저 앞에서부터 전경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떼거지로 몰려들었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수많은 사진기자들의 플래시를 받으면서 그 틈바귀를 뚫고 간신히 법정대기실로 들어가서 앉았다. 그때 처음으로 역사가 나라는 한 개인의 어깨 위를 누르는 무게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사건을 둘러싸고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내 사건에 대한 고문경찰의 무혐의 결정에 항의한다고 인천 검찰청에 불을 지른 고려대 여학생이 나와 같은 감옥에 있었다. 내가 어떤 중요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에 대한 근원적인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내 삶에 대한 연민도 그만한 크기로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그 무거운 이름의 주인공으로부터 나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분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있었다. 감정이입을 많이 억제하고 마치 ‘성고문 사건의 권 양’의 매니저가 된 듯 나는 나와는 다른 권 양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그 사건의 사회적 책임감만을 지고 나갈 뿐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너무 한꺼번에 쏟아지는 관심에 우쭐거리지 않고, 성폭력 피해자라는 동정 어린 시선이 주는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분리이기도 했다.
--- pp. 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