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레미, 도레미, 어디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건반을 누르던 하얀 손가락이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엄마, 엄마, 아이의 예쁜 소프라노가 화음을 맞추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아이가 부르는 노래에 장단을 맞춥니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행복한 날들이 피아노 소리에 맞춰 하나하나 얼굴을 내밉니다.
걷어버린 커튼 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늘은 아프도록 파랗고, 마당의 꽃들이 지는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어디 있니? 어디 있니? 꽃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아이를 부릅니다. 슬퍼하지 말아요, 엄마. 꽃 속에 있던 아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그래, 슬퍼하지 말아야지. 입술을 깨물며 나는 먼 하늘을 바라봅니다. 행복하세요, 엄마. 아이가 다시 웃음을 머금은 채 속삭여옵니다.
행복…….
그 속에 있는 동안 나는 한 번도 그걸 알아보지 못하고 살았던가봅니다. --- pp.27~28
“엄마가 보고 싶을 땐 잠을 청하곤 해.”
“잠을 청해요?”
“응, 꿈을 꾸면 엄말 볼 수 있으니까. 엄마가 보고 싶을 땐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하곤 했어. 꿈속에선 앞을 볼 수 있으니까.”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듯 소년이 다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년의 얼굴 위로 주근깨 같은 호기심이 톡톡, 박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꿈에서 엄마를 만나는 거군요?”
“그렇지. 꿈속에선 나도 세상을 다 볼 수 있거든.”
정말 눈앞에 뭔가 보이기라도 하듯 청년이 아득히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꿈에서 깨면 아무것도 안 보이나요?”
“아무것도 안 보여. 그래서 나 같은 사람한텐 꿈에서 깬다는 게 절망이야.”
“절망이요?”
청년의 말을 반문하며 소년이 물끄러미 청년을 쳐다봅니다. 소년은 아직 절망이란 말을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절망. 그렇지만 이젠 괜찮아. 생각을 바꿨거든.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것들도 다 생각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손잡고 있는 것처럼 희망과 절망도 사실은 손잡고 있을 때가 많거든. 그것들도 원래 친구 사이니까. 커서 절망을 만나더라도 네가 결코 멀지 않은 곳에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 pp.94~98
“꼼짝 마. 널 체포하겠어. 절도 혐의야. 도망갈 생각 말고 가만있어!”
순식간에 덮친 남자들이 소릴 지르며 사내를 바닥에 넘어뜨립니다. 남자들 손에는 수갑이 들려 있습니다. 영하의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빛 팔찌…….
“아빠, 우리 아빠가…….”
기민하게 사태를 알아챈 건 사내아이입니다. 지금껏 아무 말도 없던 그 아이가 누구보다 먼저 아빠가 저지른 일을 눈치 챈 것입니다.
“우릴 공원에 기다리게 해놓고 아빠가, 배고파 죽겠다는 우리를 기다리라고, 조금만 공원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그 사이에 아빠가, 아빠가…….”
갑작스런 사태에 기가 질려 있던 여자아이도 그만 자지러질듯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수갑이 채워진 사내를 끌고 가는 경찰과 울며불며 그 뒤를 따라가는 아이들. 얼른 포장마차 쪽을 돌아보는 사내의 눈이 주인부부의 당황한 눈과 마주칩니다.
돈, 그 돈, 아이들 밥값, 미리 선금으로 준 그 돈…….
입 안에 숨은 채 나오지 못한 사내의 말뜻을 알아차린 부부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허겁지겁 우동을 먹던 아이들의 허기진 얼굴과 사내가 맡긴 돈의 정체……. 넘어진 의자를 세우는 부부의 등 뒤로 휑하니 차가운 겨울바람이 지나갑니다. --- pp.104~106
“그래, 뭐니? 뭐가 갖고 싶은 거니?”
“저, 저, 엄마한테…….”
“엄마라니? 엄마한테, 뭐?”
“밥을 먹였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요.”
가슴이 울컥, 했습니다. 그제야 방구석에 놓여 있는 식은 밥 한 그릇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무 불쌍해요, 엄마가.”
“그래, 그래. 엄마가 밥을 드셔야지. 그럼 넌, 네가 갖고 싶은 건 뭐니?”
간절하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쫓겨 나는 거듭 아이를 재촉했습니다.
“저…… 떡볶이요…….”
“응? 떡볶이?”
“예, 학교 앞에 있는 그거……. 떡볶이가…… 먹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울컥, 가슴에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포장마차를 에워싼 채 떡볶이를 먹고 있는 아이들 뒤로 고개 숙인 채 비켜가는 신애가 금방이라도 눈앞에 떠오를 것만 같습니다. --- pp.141~142
-시간의 길이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머리로 분별하지 말고. 1초, 2초, 하루, 이틀, 10년, 100년, 3천 년, 4천 년, 500만 년……. 이런 식으로. 실제로 떠올려서 느껴보세요.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던 산길을 내려오며 그때 난 꿀밤나무가 내주었던 숙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을지도 몰라.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라던 그 말이 그 당시엔 커다란 힘으로 나를 흔들었던 것 같아.
정말 판단과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보기가 쉽지 않더군.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놓은 기준으로 분별할 뿐이었어.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 판단과 분별이 대상을 바라본단 말이지.
강이 가까워진다는 걸 느끼는 순간 나는 조금씩 긴장하고 있었어. 놀란 건 산길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 시절 다 자라버린 건지 나무들도 그대로인 것만 같았어.
이윽고 은빛 띠 같은 물결이 시야에 잡히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지.
강이 흐르고 있었던 거야. 그때의 그 강이, 그 모습 그대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던 거야.
--- pp.183~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