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지방정부는 최근 들어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급진적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영국이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안정된 정부 제도를 가지게 된, 보수적인 나라라는 일반적인 관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먼저 지방정부체제의 대폭적인 개편이 1960년대 이래 계속됨으로써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영국의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25년 이상 존속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은 창설된 지 15년을 갓 지났을 뿐이다.’ 이와 함께 위원회를 기반으로 과거 2세기에 걸쳐 내려온 지방정부 내부의 정치적 관리구조는 각 지방자치단체가 선택하기에 따라서 직선의 집행수장형 시장제 또는 내각제 형태의 집행부 체제로 대체되는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변화를 겪었다.
최근 20여 년간 진행되고 있는 행정관리의 동향을 보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1979년 집권한 보수당 정부의 의무적 경쟁입찰, 헌장주의, 품질 시스템, 전략적 관리, 원가센터관리 및 성과관리로부터 1997년 정권을 인수한 노동당 정부의 최고가치 및 성과계획, 횃불 지방의회, 지방정부성과종합평가, 지방공공서비스협약, 지방구역협약 등 다양한 정책의 실험은 실로 혁신의 종합 전시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준연방주의로 영국 헌정 구조의 성격까지 바꾸었다고들 하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및 북아일랜드에 대한 자치권 이양을 비롯하여 지방 거버넌스, 즉 지방자치단체와 각종 공공기관, 법인 및 지역사회단체 사이의 공동협력통치 모델의 발전, 집행제의 대두에 따른 지방의회의원들의 역할 모형 변화, 인두세의 도입과 지방정부세로의 대체 그리고 우편투표, 전자투표, 비례투표제도 등 다양한 지방선거제도의 실험과 같이 중요한 변화만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일부 독자들은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변화와 함께 우리가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영국의 지방정부가 우리의 제도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현재 영국은 총인구 6천만 명 정도에 지방자치단체의 수가 모두 468개로서, 지방정부체제가 대대적으로 개편된 1974/75 이전과 비교해서 지방자치단체의 수는 1/4 이하로 대폭 줄어들고 이에 따라 인구와 면적은 평균적으로 4배 이상 확대되었다. 그 결과 영국은 서유럽과 미국, 일본 등 다른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지방자치단체의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가 드물게 이에 필적할 정도이다.
지방재정을 보면 전체적으로 경상예산의 약 1/4 정도를 유일한 지방세인 지방정부세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우리의 교부세와 유사한 세입지원보조금 및 개별 보조금으로 지원받고 있어 국비 의존도가 매우 큰 편이다. 이와 함께 1986년 광역런던의회와 6대 광역도시권 카운티의회를 일거에 폐지한 사례나 중앙정부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10개 전 지방자치단체의 서비스와 기관역량을 평가하여 별 넷(4stars)에서 제로(0stars)까지 5단계로 등급을 매기는 지방정부성과종합평가 및 2009년부터 이를 대체할 지방구역종합평가제도 그리고 예산상한선 설정과 직무권한정지제도 등에서 보듯이 적어도 영국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정도가 거주하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중앙집권의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해서 영국의 지방정부들이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행정단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니며, 각각의 특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지방적 다양성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방자치의 발상지로서 오랜 자치의 역사를 가진 영국의 지방정부에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모든 변화는 그 자체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지방정부체제와 공통분모가 많다는 점에서 우리로서는 벤치마킹을 하든 아니면 타산지석으로 삼든 자세하게 살펴볼 만한 특별한 가치가 있다.
이 책에 대해 감히 평가하자면 영국의 지방정부에 관한 독보적인 저술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들이 중앙정부에 불가피하게 종속되어 있는 지방정부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지방의 다양성의 가치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지방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지방정부에 관한 정책과 제도를 다루면서 잘 정리된 외국의 사례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뭄 끝의 단비처럼 소중한 선물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이 역자로 하여금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보다 널리 읽혔으면 하는 욕심에서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번역을 해보겠다는 만용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지방정부 및 관련된 제반 사회현상에 관한 저자들의 해박한 지식과 거기에서 나오는 다양한 사례와 서술 방식 그리고 영국인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풍자와 해학, 중의적인 표현은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하지만 그 맛을 살려내면서 정확하게 번역을 해야 하는 역자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뢸약에 역자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영국 역사에 대하여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가진 존 베토(John Bertaut) 씨를 영어 교사로 만나서 자문을 받을 수가 없었다면 이 작업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한 행운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명확하지 못한 부분이나 오류가 있다면 그것이 전적으로 역자의 능력 부족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어나갈 때 몇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다. 먼저, 지방자치단체(local authority)와 지방의회(local council)의 의미 및 두 용어의 사용 맥락에 관한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지방자치단체는 영국 국회에 의해 창설되고 국회가 부여하는 책무를 수행하는 다기능 기관이며, 지방의회는 선출된 지방의회의원들로 구성되어 집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과 행위에 책임을 지는 지방자치단체의 법적 실체 내지 기관이다. 그러나 이 두 용어는 흔히 대체 가능한 것으로 구별 없이 사용되며, 이 책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음을 저자들은 밝히고 있다(p.120).
둘째, 영국 지방정부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계속해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으며, 그것은 원저가 발간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왔다. 중요한 내용만 몇 가지 추려보면 먼저 노동당 정부 출범 당시의 약속에 따라서 2007년 6월 토니 블레어(Tony Blair) 총리가 사임하고 당시 재무부장관이던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이 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이어서 단행된 개각에서 2006년 5월 부총리실을 승계하여 지방정부를 관장하는 독립부처로 신설되었던 지역사회·지방정부부(DCLG)의 제2대 장관에 헤이즐 블리어즈(Hazel Blears)가 취임하였다.
자치권 이양과 관련해서는 2002년 10월 이래 권한이 정지되었던 북아일랜드 의회가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진영 사이의 역사적인 화해 및 공동정부 구성에 성공함으로써 2007년 5월 다시 권능을 회복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에 통합된 지 300주년을 맞은 2007년 5월 실시된 지역의회 선거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에 관한 주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노동당을 누르고 처음으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했고, 웨일스에서는 노동당이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민족주의 정당인 플레이드 킴루(Plaid Cymru)가 의석을 확대함으로써 양 지역 모두 민족주의 성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런던에서는 1986년 광역런던의회 폐지 당시 동 의회의 대표였으며, 2000년 광역런던시의 부활과 함께 영국 최초의 직선 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던 켄 리빙스톤(Ken Livingstone)이 2008년 5월 광역런던시장 3선 도전에 나섰으나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에게 패배함으로써 이 책의 요소요소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의 정치 역정을 마감하였다.
이와 함께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두 가지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번역용어 사전’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그것은 먼저 우리말로 번역된 중요한 어휘들을 한 데 모아 사전 순서로 배열해 놓음으로써 그것들이 원저에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독자들이 쉽게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인터넷 등을 통해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는 키워드로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는 공직 사회 및 학계에서 영국의 지방정부에 대해서 논의할 때 용어 사용법이 통일될 수 있도록 나름대로 표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생소한 외국의 용어를 그대로 쓰거나, 실제 맥락과 다르게 잘못 번역하여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표준화의 필요성이 절실하기는 하지만, 학문적 소양이 부족한 역자로서는 무리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것은 완성품이 아니라 앞으로 외래 용어의 표준화 수준을 높여나가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반제품 정도로 이해되기를 바랄 뿐이다.
원저의 출간 및 역자의 주영대사관 근무와 거의 동시에 시작되어 장시간 계속된 번역을 마치면서 이제야 스스로 묶어놓은 족쇄에서 풀려난다는 해방감과 함께 내가 가진 에너지를 여한 없이 소진시켰다는 마라톤 골인 지점에서 맛볼 수 있는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 이 번역서가 지방정부 및 지방자치제도의 이해와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역자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번역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원저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존 베토 씨와 이 번역서가 햇빛을 볼 수 있도록 출간을 허락해 주신 박영사에 감사드린다.
2008년 12월 10일
임 채 호
--- '저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