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관련된 언어를 폐기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인류는 여전히 소외, 진실의 왜곡, 지옥 같은 현실, 죽음을 경험한다. 이를 가리키는 언어를 버릴 때 그 앞에서 우리는 그저 벙어리가 될 뿐이다. 무어라 부를지도 모르는 사태가 우리 삶에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 사태를 회피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죄의 언어가 사라지면 은총의 언어 또한 약해진다. 무엇
을 용서받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면 그 용서가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p.14~5
나는 자신이 캄캄한 심연을 헤맨다고 느끼는 이들, 그러면서도 그를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 죄라는 단어가 지닌 참된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관심이 있다. 이들이 있는 한 죄라는 단어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현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으니 우리는 그 현실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이를 표현할 언어를 찾아 여기저기서 가르침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가장 희망적인 가르침은 여전히 교회에 있다. 이 언어는 죄에서 은총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언어는 우리에게 죄와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새로운 생명을 약속한다.--- p.13
왜, 어떻게 우리의 언어는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게 되었을까. 어쩌다 사람들이 교회가 아닌 다른 곳으로 생명을 찾아 나서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사람들이 ‘죄’와 ‘구원’을 진부한 단어로 여기도록 만들었을까. 어쩌다
이 말들은 힘을 잃고 텅 빈 언어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 완벽하게 답할 자신은 없다. 다만, 우리가 구원의 언어를 잃어버리는데 영향을 미친 시대적 분위기는 어느 정도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p.36~37
이 시대에 설교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죄의 경험과 그 여파를 생생하게 묘사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죄가 이미 현존하고 있음을 식별해 내도록 돕는 일뿐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사람들에게 만성적인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인간이 태생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논증하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열망하는 우리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p.42~43
죄를 지은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버려진 땅에서 방황한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추가로 어떤 벌을 내리시기보다는, 생명의 길을 저버린 그들을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신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다. 유술柔術이나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 규율을 중시하는 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그들의 반역에 어떤 벌을 내릴지 계획하지 않으신다. 그저, 그들이 생명을 거절하는 일을 자행하도록 내버려 두셔서 그들 자신이 그 일의 무게와 크기를 느끼게 하신다.--- p.66~67
오늘날 세상은 빠르게 달음질친다. 우리는 세상에 발맞추기 위해 세상이 우리에게 처리하라고 요구하는 사항들에 우리를 바친다. 우리는 경쟁하고, 성취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축적하고, 우리 자신을 방어한다. 그러면서 이런 생활을 유지하도록 도움을 받고, 이런 생활 중에 일어나는 죄책감을 추스르기 위해 상담사를 만난다. 그렇게 내 문제는 내가 처리하고 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처리해야 하는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설득한다. 내면에서는 아픔이 커져 가지만-무언가 정말 중요한 부분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산다는 건 그런 거라고, 그 통증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징후가 아니라 매월 있는 월경통처럼, 혹은 치질처럼 그저 익숙해져야 하는 통증이라고 한다. 그것을 실존적인 불안이라고 하자, 인간의 조건이라고 부르자, 삶이라고 하자 한다. 그러나 그 아픔을 죄라고 부르기로 결단하면, 그 순간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에 급진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무언가를 죄라고 부르는 행위는 그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며 그 단어가 요구하는 바를 받아들이겠다고 선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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